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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밈혜윤 Apr 19. 2024

Z, 네가 진창을 걸을지라도

친애하는 여러분

   Z는 외로웠다.

   Z는 21세기를 코 앞에 둔 1999년 3월에 태어났다. Z는 사랑스러운 막내아들이었다. 부모와 두 누나의 사랑, 특히 큰 누나의 사랑을 담뿍 받으면서 고집스럽고 건방진 유아로 자랐다. Z는 영특했다. 유치원에서도 선생님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Z의 영특함을 알아본 부친은 Z를 빠른 년생으로 학교에 입학시키기로 결정했다. 어쩌면 그때부터 Z는 외로웠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친구들,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커리큘럼에 적응해야 했다. 친구들은 한 살 어린 애기라면서 놀이에 잘 끼워주지 않았고 괴롭히는 아이도 있었다. Z는 자주 누구누구가 자기를 괴롭힌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Z에게 "코피를 내서 본때를 보여주라"라고 했다. 하지만 Z는 천성이 물렀다. 어느 날 같은 반 어떤 아이가 괴롭혀서 울면서 집에 왔을 때, 어머니가 속상한 마음을 붙들고 울먹였을 때, Z는 울면서 말했다. "엄마 걔한테 내가 사과할까? 내가 사과할게, 엄마 울지 마."


   Z를 월반시킨 이후로 엄마와 큰누나는 때때로 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괴롭힘 당하지 않았을까. 오늘은 친구와 어울려 놀았을까. 시간은 천천히 그러나 성실하게 흘렀다. Z는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가족들은 안심했다. 이제는 완벽히 적응했을 거라고. 아이들도 충분히 크고 철이 들었으니 고작해야 1년 미만의 살아온 시간으로 Z를 차별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Z는 더 이상 괴롭히는 아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Z는 틈만 나면 PC방으로 달려가고 새벽에 몰래 게임을 하는 평범한 남고생이었다. 우리 눈에는.


   평범한 학교 생활이란 건 뭘까. 친한 친구들과 어울려 게임을 하고, 상스런 말을 뱉으며 낄낄 웃고, 그늘 따윈 모르는 얼굴로 중무장하고 등하굣길을 오가는 것일까. Z는 몇몇 친구들과 전반적으로 그런 학교 생활을 보냈다. 또한 가족 모르게 그늘진 얼굴을 감췄다. 게임과 장난을 좋아하지만 축구를 싫어하고 또래 남자애들보다 섬세한 감성의 Z는 종종 교내 포식자들의 먹잇감이 됐다. Z는 조롱을 견디고 분노를 삭이는 법을 일찍 배워야 했다. 우리는 왜 요즘 별일 없냐고 묻지 않았던가. Z의 천진한 얼굴을 너무 믿었던 탓이다.


   Z가 딛는 길

   Z는 대학을 진학하고 아주 조금씩 단서를 뿌려 주었다. 견뎌야 했던 모멸감과 채 녹이지 못한 분노 같은 것들에 대해서. 가족들은 당황해서 서툰 마음과 말로 흘려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혹은 네가 더 열심히 살고 잘난 사람이 되는 게 복수하는 거라고 말했다. 그런 말들이 Z를 더욱 스스로 용납하기 힘든 한 때를 만든 것 같다. Z가 원한 건 그랬니, 힘들었겠다, 네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니, 따위의 심심한 위로의 말이었을지도. 우리는 사랑과 걱정이라는 미명 하에 Z를 더 먼 벼랑 끝으로 세운 걸지도 모른다. 


   Z는 기나긴 인고의 시간만큼 키가 훌쩍 컸고 짊어졌던 비밀의 무게만큼 마음의 품을 키웠다. 여전히 또래에 비해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수성의 이 남자는 예민한 가족 구성원들의 신경질과 고민을 받아낸다. Z는 한때의 가족들의 실수를 받아들였다. Z도 여전히 히스테릭할 때가 있지만 스스로의 히스테리를 잘 다스려가는, 꽤 믿을 만한 남자가 되어가고 있다. Z가 지난 시간들의 수치와 외로움을 모두 웃어넘길 정도가 되었는지 A는 알 수 없다. A는 소망한다.


   Z가 앞으로는 외롭지 않기를 바란다. 인생이란 녀석은 끊임없이 모멸감을 흩뿌려대니 그쪽은 피할 길이 없으나, 자기편이라고 굳건히 믿는 사람들이 항상 곁에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들 안에 자신이 포함돼 있다면 좋겠다고 A는 늘 생각한다. A는 Z에게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Z를 떠올릴 때마다 A는 스스로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 할 이유를 하나 더 찾는 기분이 든다. 


   A는 Z가 꽃길을 걷길 바라지 않는다. 흙탕물을 튀기면서 질은 땅을 걸어보기도 마르고 뽀송한 흙길을 걸어보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A와 Z는 그래야 한다. 너무 쉽게 멍드는 마음들이 그나마 단단해질 수 있는 방법은 거친 길을 걷는 법뿐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비록 거치고 성가신 길일지언정 항상 육지를, 지반 위를 걷기를 바란다. 시커먼 바다가 입을 벌리고 있는 아슬아슬한 벼랑 끝이 아니라.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가 걷는 길 위에 꽃을 심어 직접 길을 가꿀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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