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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밈혜윤 Apr 05. 2024

G와 V의 안락한 집에 어서 오세요

친애하는 여러분

    어휴 진정 좀 해

   친애하는 G... G에 관해 쓸 말을 한참 생각해 봤다. 둘이 하는 이야기의 96% 정도가 먹는 얘기뿐이라서 먹방, 맛집 따위의 키워드만 자꾸 떠올랐다. 그녀는 맛집을 좋아하고(하긴 누가 맛있는 걸 싫어하겠냐마는), 엄청나게 집을 사랑하는 위인이지만 맛집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집 밖으로 나온다. 근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G는 정말 집을 엄청나게 좋아한다. 친해지는 과정에서 뭐 해? 물어보면 8할은 집에, 특히 침대에 있다고 했다. 


   G와 가까워질 때 나는 이별 직후였다. 친구들에게 티는 안 냈지만 절절히 마음 아파하면서 우리가 어디부터 잘못됐을까를 생각했다. 매일 후회와 자책 속에 정신을 못 차렸다. 이런 말 하면 놀림당하기 딱 좋다만, 그래! 나는 헤어진 녀석을 매우 사랑했던 것이다! 스무 살도 아니고 이별에 절절매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나는 부러 농담을 곁들여 이별을 말하곤 했다. 다른 친구들은 웃음기 섞어 말하면 같이 웃었다. 같이 웃어주는 것도 좋았지만 G 같은 반응도 좋았다. G는 웃지 않았다. 진지하게 들었다. 그리고 웃음기 없이 말했다. 우리가 좀 더 일찍 친했더라면, 어디야? 바다라도 갈래? 했을 거야. 진짜로 갔을 거냔 되물음에 G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랬을 거야. 


   종종 그 대화를 복기한다. G는 모르겠지만 그 대화는 그 시기에 들었던 어떤 말보다 굉장한 위안이 됐다.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혼자면 어때- 류의 상투적인 진실 이야기도 괜찮다. 다만 친해진 지 얼마 안 됐어도 누군가 내게 그런 마음과 시간을 쏟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건드렸다. 곁에 너무나 오래된 관계, 서로 관심과 시간을 쓰는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관계만 가득했기에 신선한 맛도 있었다. G가 앞으로 나에게 어떤 서운한 행동을 하더라도 나는 어쩌면 그 대화 한 토막을 가지고 G를 이해하고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다. 


   G는 성격이 좀 급하다. 차를 얻어 탈 적마다 G는 다른 차가 우물쭈물하는 3초를 참지 못하고 빨리 좀 가라, 왜 안 가?! 하고 염불을 욌다. 자주 우물쭈물하는 초보운전자로서 괜히 저격당한 기분이 들었다. G는 말도 엄청 빠르다. 나도 말을 상당히 빨리 하는 편인데 그런 나도 G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 못 알아들을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G를 만나면 말하곤 한다. G야 뭐라고? 아니 미안한데 진정 좀 해.


   GV비앤비

   G는 V 공주와 룸메이트다. V 언니는 이상하게 공주를 붙여서 말하게 된다. G와 차근히 거리를 좁혀가고 있을 때 농담하듯 ‘V 공주’라고 칭했던 게 내 입에 붙은 모양이다. G, V의 집에 처음 초대받았을 때 나는 기묘한 흥분을 느꼈다. 친구 집에 초대받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때만 해도 코로나 때문에 조심하는 분위기가 미적지근하게 남아 있었다. 앞 문장은 핑계고 실은 내가 친구 집에 가는 걸 꺼렸다. 친구들의 너무나 사적인 영역을 나도 모르게 과한 호기심으로 뒤적일까 봐 염려하고 차단하려는 마음, 즉 앞서 나가서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나아가 집주인이라는 이유로 친구가 도맡는 여러 준비나 뒷정리가 신경 쓰였다. 밖에서 만나면 주는 대로 먹고 우리는 다 같이 일어나서 떠나버리면 그만인데. 


   그런 마음이 있었으므로 나는 G가 초대하는 손님들을 위해 이거랑 저거랑 요리할게,.라는 말을 듣고 기절초풍할 것 같았다. 초등학생 때 친구네 집에 놀러 가 친구 어머니들이 저녁을 챙겨주던 이후로 집에서의 융숭한 초대는 너무나,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거절하진 않았다. 거절하기엔 인스타로 가끔 구경하는 G의 요리가 너무나 때깔이 고왔다. 그리고 이미 좋아하기로 결심(?)한 G의 룸메 V 공주, G의 친구들이 궁금했다. 그들에게 G의 친구로 소개받음으로써 더 친밀해지는 기분을 느끼고도 싶었다. G의 영역에 쏘옥 들어가 박힌 돌이 되고 싶었다. 게다가 G는 그때 파김치를 담갔다고 했다. 나는 파김치를 매우 좋아한다…


   G와 V의 집에서 적당히 술을 마시고 막차 시간이 되면 떠날 작정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하는 홈파티는 너무나 재밌었고 나는 도저히 그 재미를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빠른 속도로 잔을 부딪쳤다. 이제야 말하지만 그때 나는 확실히 내 주량을 엄청 웃도는 폭음을 했다. G는 중간에 침대를 정리해야겠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본인이 침대 위에 ‘정리’되었고, 나는 V 공주와 함께 밤을 지새웠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생각은 안 나지만 V 공주는 무심한 사진들과 다르게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를 곧잘 들어줬다. 나는 그만 무장해제되어 내 가슴속 슬픈 이야기를 마구잡이로 꺼내고 휴지로 눈가를 여러 번 훔쳤다. 처음 본 사람에게! 다음 날 이불을 팡팡 찼다. 과장 조금 보태서 그날 내 이불 터졌다. 


   이후로 나는 서너 번쯤 더 그들의 집에 놀러 가 새벽까지 놀았다. 한창 불면증을 앓고 있던 탓에 자고 가라는 그들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치고 새벽에 집으로 떠났다. 걱정할까 봐 카톡이나 손으로 쓴 쪽지를 남겨두고 나왔는데, 그럼에도 충격받은 듯 ‘어디 갔어! 가버렸어?’ 등의 벼락같은 카톡에 왠지 모를 미안함을 가졌다. 가장 최근엔 드디어 그들의 집에서 자고 왔다. 심지어 오피스텔에 딸린 헬스장에서 운동도 하고 나왔다. 어느새 그녀들이 많이 편해진 것도 있고 불면 이슈가 덜해진 것도 있다. G와 V는 어쩌다 보니 내가 최악에서 조금 벗어난 정도의 시기와, 엄청나게 좋아진 시기를 함께 하고 있다. 


   인생에 수많은 사람들이 곁을 스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가왔다가 멀어졌다가 하던 때는 20대였다. 풀이 좁아진 30대에 접어들어 새롭게 다가온 G, V 공주와의 인연은 얼만큼 이어질 수 있을까, 되뇔 때면 벌어지지 않은 일인데도 우리가 멀어지는 순간이 침울해진다. 나는 이미 G와 V 공주를 소중히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20대는 모든 관계의 영원성을 뇌까려대면서도 막상 관계가 파괴될 땐 생각보다 무감했다. 30대에는 더 이상 영원성을 기대하지도 말하지도 않지만 좋아하는 관계의 고리가 부서질 때 야트막한 상실감을 느낀다. 우리 관계가 어떤 식으로든 부수어지지는 않았으면, 상실감을 느낄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늘 약간은 어둡고 따뜻한 색의 조명으로 들어차는 G와 V 공주의 안락한 집처럼, 완전히 환하지는 않고 적당히 그림자 지는 편안한 방식으로 이어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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