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밈혜윤 May 25. 2024

너는 물렁한 마음과 단단한 가슴팍으로 글을 써야지

오늘은 수요일

   요즘은 참 힘들었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날들이었다. 아니, 잠깐만. 그러지 않았던 날도 있었던가?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겠지, 혹은 해야지, 그런 마음으로 플래너에 빼곡히 적어둔 계획들은 과반의 확률로 미뤄졌다. 다른 날로 미뤄진 계획은 또다시 과반의 확률로 폐기되기 일쑤. 마침내 폐기되는 계획들은 뭉툭한 빨간색 색연필로 사정없이 엑스자를 뒤집어썼다. 커다란 엑스자를 칠수록 마음이 거꾸러졌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을 ‘이 정도’로 퉁치면서 나는 점점 나를 우습게 여긴 것 같다. 의지 없는 새끼라던가 형편없는 새끼라던가. ‘새끼’ 앞에 갖다 붙일 수 있는 표현이 어찌나 많던지, 때때로 스스로에게 놀랍다. 국어 공부를 좀 덜 하고 독서를 덜 할 걸 그랬나 봐.


   빨간 색연필로 엑스자를 치면서, 스스로의 격을 강하시키면서 2024년의 절반 가까이 지났다. 많은 계획을 갖는 것도 모자라 더 많은 목표를 자꾸 그러안는 내 성격을 아는 주변 사람들과 상담 선생님은 반복해서 말했다. 좀 내려놔. 내려놔야 돼. 그러고 싶었지만 ‘내려놓을 만한’ 일은 없었다. 연료가 고갈되는 줄 느끼면서도 연료창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애쓰면 더 노력할 수 있는 것처럼, 노력만 하면 저절로 배터리 용량이 커지는 것처럼 굴었다. 나는 습관처럼 이를 악 물면서 순간의 기분에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의지 없는 새끼. 맨날 내 기분에 지는 새끼. 이긴 적 없는 스스로와의 싸움이 거듭되어도 패배감은 옅어지지 않았다. 이상한 말이지만 뇌의 중앙이 동그랗게 마비되는 것 같은 기분을 자주 느꼈다. 다들 이러고 살아. 아니, 같은 시험 준비하는 다른 수험생들은 나보다 더하게 살아. 이런 식으로 해서 뭐가 될 거야? 맹비난을 하면서 빨갛고 커다란 엑스자를 쳤다. 엑스자는 점점 신경질적으로 그어졌다. 마비되는 것 같은 느낌의 영역이 점점 퍼졌다. 물러설 순 없었다. 또 질 수는 없으니까. 이미 나는 내 기분에 계속 지고 있으니까. 패배를 덧대고 싶지 않아.


   두 팔에 날카로운 고통과 무감각함이 찾아들면서 내 전투는 강제 종료되었다. 물리치료를 하고 약을 먹어야 했다. 운동은 바로 중지해야 했고 공부는… 벌벌 떠는 마음으로 붙들고 있다가 잠깐 덮어놨다. 마침내. 책을 덮으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속도를 내서 글씨를 빠르게 쓰면 손끝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지고 쑤시듯 아팠다. 강제로 전투 모드를 종료하면서 일순 들었던 ‘마침내’의 감각. 후련함과 자유로움이었다.  


   물렁한 마음과 단단한 가슴팍으로

   친구들에게 원래도 힘들다는 말은 잘 안 했지만 달력에 빨간 엑스를 치게 되면서 더욱 입을 닫았다. 입만 닫은 게 아니라 눈과 귀와 마음을 모조리 닫은 것 같다. 아주 옛날에 했던 방식을 꼭 닮았다. 대놓고 물어오지 않을 뿐 나의 지난날을 관찰한 바 있는 사람들은 위태로운 정신 상태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물어오지 않는 마음은 질문으로 내 마음을 들쑤실까 염려하는 마음일 것이다. 친구들이 힘든 일을 혼자 간직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나는 내 갈비뼈 안 깊숙한 곳에 숨겨둔다.


   니 최근 글이 왜 그 모양임? D에게 불쑥 카톡이 왔다. 이 새끼, 역시 구독은 않고 음침하게 검색해서 내 브런치를 모니터링하고 있었구나. D에게도 얼버무려 넘어갈까 했지만 내 글을 다 보고 온 사람한테 속임수가 통할 리 없다. 다 말했다. 내 빨간 색연필과 지겨운 모래색깔 플래너에 대해서도, 끓는 모래처럼 내 다른 영역을 눌러 죽여가는 압박감과 다시 스멀스멀 피어나는 자기혐오에 대해서도. D에게 보내는 카톡에 1이 즉시 지워졌다. 횡설수설 이어지는 내 말풍선을 D는 실시간으로 읽었다.


   일단 엑스를 그만 치면 좋겠는데 꼭 해야겠다면 색연필을 바꿔 봐. 초록이나 파랑 같은 걸로. 나는 즉시 답장을 보냈다. 미친놈인가? D의 답장은 전문 용어로 ‘얼탱이가 없는’ 내용이었지만 왠지 납득이 가기도 했다. 아무래도 빨간색은 정신이 날카로워지긴 하지. 바보 같고 어른스럽지 않은 내용의 말풍선을 몇 개 주고받으면서 살짝 웃었다. 기분이 좀 가벼워진 것 같았다. 나에 대해 쓴 글 잘 봤어. D는 덧붙였다. 무슨 그런 거에 감동을 받냐? 졸라 말랑하네.


   파하하 웃음이 났다. 맞다. <친애하는 여러분>의 글 주인공 몇몇에게는 글을 보여줬는데 보는 족족 그런 말을 했다. 이런 일이 있었나?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누구는 사소한 말과 일로 글까지 써주어서 고맙다고 했고 또 누구는 역시 너는 정말 감성적이라고 했다. 쉽게 감동받고 사랑을 느끼고 뿌듯한 물렁한 마음. 그게 내 정체성이다. 마음은 물렁하지만 그간 벤치프레스를 열심히 해서 꽤 단단한 가슴팍을 가졌다. 훌륭한 대구對句다.


   물렁한 마음과 단단한 가슴으로 계속 별 것 아닌 사랑들을 느껴야지. 남들은 무심히 지나치기도 하는 조그만 사랑이 말랑한 얼굴을 빛내는 글을 써야지. 그게 난데. 친구의 카톡과 며칠의 휴식이 부러지기 직전까지 굳어진 정체성을 깨워준 것 같다. 조금 더 쉬면서 더 물러져야겠다. 운동을 못하니까 가슴팍도 조금 덜 단단해지겠지만 나의 정체성이 본래부터 단단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뭐, 용인해 줄 만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무 것도 아닌 글을 쓰는 것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