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훌쩍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는 R의 용기

친애하는 여러분

by 밈혜윤

어느 날 R이 떠난다고 했다

나 출국해. 어느 날 갑자기 R이 툭 말했다. 하던 일을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서 스웨덴으로 떠난다고 했다. 스웨덴...? 미국도 아니고 영국도 아니고 이탈리아 프랑스 중국도 아닌 스웨덴. 친구가 몇 년씩 해외로 나간다는 사실도 서운한데 그게 하필 스웨덴이라는 것도 서운했다. 너무나 낯설고 생경한 나라. 내 주변에서는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곳.


너는 무슨 그런 말을 옆동네 이마트 가는 것처럼 말하냐. R은 그냥 껄껄 웃을 뿐이었다. R이 출국하기 전에 우리는 경복궁쪽 어딘가의 오뎅바를 찾았다. 기름진 오뎅과 소맥을 잔뜩 말아먹었다. 또렷한 정신으로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엔 살짝(많이) 취했다. 술기운을 빌려서 R과 지난 시간이 엄청 재밌었다고, 앞으로 아쉽고 보고 싶을 거라고도 말을 했다. R은 늘 그렇듯 웃는듯 마는듯한 얼굴로 그날 작별 인사를 했다. 다음날 나는 배탈이 거하게 났다. 사실 기름진 걸 많이 먹지 못한다.


R은 속된 말로 '뒤지게' 바빴다. 뒤지게 바쁘지만 절대로 퇴근해서 그냥 자버리지 않고 우리가 천장까지 쌓아둔 카톡을 읽고 답장을 했다. 약속에 꼬박꼬박 시간을 내서 왔다. 한 시간을 앉아 있더라도 모른체하지 않고 나오던 R의 시간과 노력이 고맙다. 그때도 고맙다고 생각했지만 일일이 말로 꺼내진 않았다. 표현하는 게 쿨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쿨몽둥이로 말린 북어처럼 북북 맞아야 하는 어린 날이었다.


R은 떠났다. 나는 R이 잘 지낼지 궁금히 여겼지만 연락하여 물어보진 않았다. 그때 내가 상황이 안 좋아서, 내가 좋아하는 R이 혹시라도 해외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면 더 힘들 것 같은 이상한 기분 탓이었다. 아주 가끔 R에게 안부를 물었고 한 번쯤, 아니 두 번쯤, R에게 엽서를 띄웠다.


R의 용기에 대해 생각해

스웨덴, 발음해볼 때면 아직도 생경하다. 어떻게 그런 곳을 대뜸 떠날 생각을 했지? R은 작년인가 재작년에 이미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도 나는 어떻게, 그곳에 갈 생각을, 하고 종종 생각한다. 아마 R이 스웨덴이 아닌 또 다른 나라로 훌쩍 떠날 수도 있어서 아직도 되새겨보는 것 같다. 또 떠난다면 좀 익숙한 나라로 가줬으면 좋겠다는 알 수 없는 바람이 있다.


타국에서 이방인으로써 새출발을 해야 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아마 누군가는 그것을 간절히 바랄 테지만 나로써는 온 힘을 다해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R은 정말로 바라는 쪽이었을까, 되도록 피하고 싶은 쪽이었을까. 어쩌면 둘 다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 R은 그저 자신이 하려는 일이 너무 좋아서, 너무너무 잘하고 싶어서 출발에 대한 두려움은 얼굴을 간질이조차 않았을 수도 있겠다.


그토록 자기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직면하는 용기에 대해 생각한다. 사랑은, 절망과 수치를 수하처럼 끌고 온다. 하고자 하는 일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을 만큼 미움과 슬픔을 갖는 경우를 여러 번 봐왔다. 나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건 아마 뭔가를 너무 사랑한 적이 없어서일 것이다. 뭔가를 너무 사랑해버리기 전에 얼른 마음을 내려놓고 줄행랑쳐서일지도 모르고. 마음이 다치지 않을 만큼만 관심을 갖고 노력을 쏟는 나는 고국을 떠나는 비행기에 훌쩍 올라타는 그 마음과 열정을 모른다.


R을 떠올리면 반드시 용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를 떠올릴 때 용기를 생각하게 되는 건 아주 드문 일이다. R은 내게도 종종 용기를 불어넣어 줬었다. 남에게 언제나 나눠줄 정도의 용기를 가진 R. 자주 만나진 않지만 나는 너를 매우 좋아해.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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