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떤 목소리는 꼭 지문 같고,

오늘은 수요일?

by 밈혜윤

엄마는 물어봤다고 했다.

걔의 그 책은 혹시 유언 같은 거니?


예쁜 말만 가득한 그 책을 어떻게 유언으로 받아들인 거지, 했다가, 하긴 유언은 대개 예쁜 말만 있기 마련이지- 생각했다. 사람은 죽는 순간에는 증오보다 사랑을 말한다고 했다. 생의 마지막이 초속처럼 빠르게 내게 달려오고 있음을 느낀다면 나 또한 꾹꾹 눌러서 쓸 것이다. 내가 많이 사랑해.


과거형으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 마지막 말이 과거형이라면 남겨진 사람들은 영원히 과거형의 사랑을 떠올리게 된다. 내 빈자리는 현재형의 사랑으로 채워주고 싶다.


오랜만에 D에게 연락이 왔다.

요즘은 왜 글 잘 안 올리냐. 작가가 글도 안 쓰고 뭐 하고 살어. 늘 그랬듯 간결했다. 네 간결함이 정말 부럽다. D는 내가 자비 출판 프로젝트를 감행한 이후 꼬박꼬박 나를 작가라고 일컬어 준다.


불현듯 텍스트인데도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건조하고 딱딱한 말투. 도대체가 나를 좋아하는 건지 질책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말투. 고민하다가 결국은 좋아하는 쪽이겠거니 결론짓게 만드는, 말투를 중화시키는 낮은 목소리.


D에게 연락이 올 때는 기가 막히게도 글을 채근할 때뿐이다. D는 어느 날은 내게 ’뭐라도 써서 어디 좀 내보라‘고 말했고 또 다른 날엔 ’젊은 작가상은 젊을 때 등단, 당선되어야 하는데 네가 젊을 때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도 말했다. 네가 하려는 게 격려냐, 악담이냐. 좀 정해다오, 하니 D는 ‘꾸준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어째 포인트가 이상한 훈화 말씀을 선사해 주었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기분 나빴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D의 낮은 목소리라면 괜찮다. 대화란 어떤 말을 하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톤과 태도로 말하는지도 중요하다. D의 목소리에는 나를 앞으로 밀어내고 밑에서 받쳐주는 힘이 있다.


남기고 남길 것

D의 목소리처럼, 어떤 사람은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그의 많은 것들이 생기 있게 생각난다. 어떤 이의 달걀을 책상에 굴리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또 어떤 이의 몹시 느리고 졸린 말투가, 다른 아무개가 자주 하는 농담이 떠오른다. 지독한 현생을 살아내다 그런 게 맥락 없이 생각나면 나는 아주 잠시 웃게 되는데, 이런 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일 쏘냐.


나는 사람들의 인상 깊은 것들을 많이 관찰하고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들이 나를 떠올릴 때 그의 마음속에 떠오른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빻은 소리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니 빻은 말도 괜찮다! 하지만 마무리만큼은 언제나 잔잔하고 담백하게 당신을 좋아합니다,라는 내 마음을 덕지덕지 붙여주고 있기를 바란다.


그런 목소리를 많이 남기려면. 평소에 많이 남겨야 한다. 질주하는 죽음의 얼굴을 슬쩍 엿보고서야 사랑을 말하는 삶은 너무 슬프다. 쑥스러워서 사랑한다고 곧이곧대로 말하지는 못해도 당신이 이래서 좋고 저래서 귀엽다고 많이, 많이 쫑알대야 한다. 그런 내 마음을 상대방이 알아주지 못해도. 혹은 돌려주지 않아도. 심지어는 배반하여도. 내 마음이 남는 한은.


나는 보통 그런 작업을 글로 해왔던 것 같다. 어렴풋이 생각하면 아주 잠시 웃게 되는 순간을 기억해 두었다가 다른 기분 좋은 순간들을 버무려서 기록하곤 했다. 피곤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한동안 브런치를 접속조차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일상의 피로와 불행은 사랑을 돌보지 않아서였을까.


사랑의 표현은 거창한 약속이 아닌 것 같다.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를 오래 기억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