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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밈혜윤 Nov 25. 2021

[긴낮짧밤] 의미 있다고 말해주세요

인정욕구 쩌는 어느 날

   인생은 자신만만한 사람을 넘어뜨린다. 나는 요즘 자신만만했다. 이제는 흔들리지 않고 내 중심을 잡을 수 있다고, 산전수전 공중전 다 겪은 사람처럼 그렇게 믿었다. 위기는 그런 때를 노린다.


   나는 손쉽게 나빠진다.

   어제 약을 못 먹었다. 먹은 줄 알았는데, 손바닥에 다른 영양제와 함께 올려놓고 입에 탁 털어 넣는 순간 저녁 약이 바닥으로 튄 모양이었다. 입 안에 저녁 약보다 커다란 영양제를 굴리면서 나는 다 먹은 줄 알았다. 못 먹은 저녁 약은 오늘 아침 거실 바닥에서 발견됐다. 어쩐지 새벽에 통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리더라니.


   수면 부족, 그리고 약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의 인지는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를 만든다. 오늘도 회사에서 나는 급격히 감정의 기복을 타기 시작했다. 대수롭지 않은 것들에도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끝없는 생각을 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울적함으로 내달렸다. 면밀히 따지고 보면 울적한 감정이란 건 사실 습관이 아닐까. 약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먹었다고 굳게 믿었다면 오늘의 울적함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작은 균열이 이렇게 나를 뒤흔든다는 사실이 싫다. 이랬다면, 저랬다면 하고 덕지덕지 붙는 나의 가정들과 감정들이 싫다. 이렇게 취약해지기 시작할 때 내가 의심하는 것들이 싫다. 나는 아직도 너무 쉽게 나의 중심을 놓친다.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 법을 알 수 있다면. 누군가는 허청대는 위태로움을 청춘이라 부르며 예찬하지만 나는 사회적 통념상 '청춘'을 지나도 위태로운 헛발질에서 결코 놓여날 수 없을 것만 같다. 지금은 젊음으로 용서받지만 여전히 위태로울 미래의 날에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무섭다.


   아, 지금 이 순간도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의미 있다고 말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감정과 생각이 날뛰는 날이면 나는 의심하기 시작한다. 왜 그렇게 자신만만했을까. 이만큼 취약한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의미가 있을까. 나도 나를 가눌 수 없어 툭하면 혼자만의 굴로 도망치는 내가? 사랑과 증오가 뒤섞인 얼굴로 나를 보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겐 애정과 우정 깃든 눈을 보여주었을까.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명랑하게 웃으면서 삶의 모든 걸 낙관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아. 알아도 나를 주저 앉히는 이 무거운 감정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사는 건가? 의문이 고개를 쳐들 때면 내 우울의 궤도는 꼭 원죄 같다. 세상이 끝나도 사라지지 않을 원죄의 처벌.


   내 형刑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무용한 생각을 해본다. 어쩌면 내 힘든 마음에만 급급해 주변의 마음을 둘러보지 못한 데서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항상 지독하게 이기주의자였다. 혹 가까운 친구가 비슷한 마음으로 괴로울 때 나는 어깨를 두드려준 적이 있었나. 늘 내 마음이 궁박해 멀찍이 있었던 것 같다. 친구가 도저히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만큼 멀찍이,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양 회색 얼굴을 하고.


   여태까지의 쓸 데 없는 생각을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다. 의심 어린 생각을 하지 말고 믿으려 애써야 한다. 지난한 이 시간들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거야, 내 친구들이 내게 의미 있듯 나도 그럴 거야, 하고 절박하게 믿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명쾌히 말해줄 수 있는 친구가 될 테니까. 내게 의미 있는 얼굴들을 생각하면서 과거를 치운다.


   여태까진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친구의 어깨를 다정히 두드려주면서 확신을 갖고 말해줄 거야. 너의 힘든 마음이 네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잘 몰라도, 너는 내게 확실히 의미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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