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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밈혜윤 Dec 03. 2021

[긴낮짧밤] 서른, 구몬을 등록했다

칭찬과 성취가 필요한 당신에게

   기능적인 공부

   우리는 평생 기능적인 공부를 해왔다. 달리 말하면 '쓸모 있는' 공부만 해왔다. 중고등학생 때는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했고, 대학에서는 졸업과 취업을 위해 공부했으며, 직장인이 되면 승진을 위해 공부한다. 대다수는 기능적인 공부 외의 공부는 하지 않는다. 공부는 나의 길이 아니라던가, 여태 열심히 했으니 하기 싫다던가, 여러 이유로 공부에 대해 반발심을 갖는다. 나도 공부의 ㄱ만 들어도 머리가 아파지곤 했다.


   하지만 나는 서른에 다시 구몬학습을 신청했다.


   그땐 그랬지

   내 또래 중에 구몬, 빨간펜 없이 자란 사람은 거의 없을 거다. 국어와 수학을 필두로 참 많이들 학습지를 했다. 그리고 참 많이들 문제지를 찢어 숨기고 거짓말을 했다. “숙제 다 했는데 학교에 두고 왔어요”, “고리가 풀려서 몇 장 없어졌어요”, “선생님이 이것만 주셨는데요?” 같은 말들이, 당신도 깨나 친숙하지 않은가? 그때는 엄마가 하라고 하니까 싫어하면서 했다.


   구몬(그외 학습지)의 장점이자 단점은 무한 복습이었다. 지난 번에 풀었던 문제를 풀고 또 풀고 다 아는 걸 또 하라고 해서 싫었다.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다. 무한 복습을 통해서 나는 천천히 단련됐다. 암산에 능해지고 단어를 잘 외우고 읽기가 빨라졌다. 구몬을 그만두게 된 건 중학교에 올라가면서였다. 학습지와 영원한 작별을 했다고 생각하며 조금은 후련했고 조금은 섭섭했다.


   그때부턴 국어에서 수학으로, 수학에서 영어로 학원을 요리조리 옮겨 다니면서 정신 없는 일과를 보냈다. 물론 숙제지를 찢어 감추던 짬바는 어디 가지 않아서 학원 숙제도 잔머리 굴리며 안 하고 답지를 베끼고 학원을 빼먹는 등, 다양한 기만(!)을 시도했다.


   학습지가 그립지 않았냐고? 그럴 리가. 학습지 선생님이 오시면 과일이나 간식을 내오면서 엄마가 등 뒤에 지키고 있었지만 학원은 엄마가 없었는걸! 학원을 같이 다니는 친구들과 은근히 눈짓을 주고 받으며 숙제가 없었던 척 공모하고 몰려다니며 떡볶이를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다시 학습지를 등록할 날이 올 줄 몰랐다.


   취미도 공부가 필요하다

   서른. 늦지 않았지만 왠지 늦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나이. 이십대의 끝자락을 흘려보내고 30대에 마주하면서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정신 연령은 갓 스물이 됐던 그때 머물러 있는데 더는 어리지만은 않기에 혼란스러웠다. 뭔가를 새로 시작하는 게 거칠게 말해 ‘나잇값 못하는 헛지랄’일까 봐 무서웠다. 게다가 어릴 때와 다르게 좌절하면 회복까지 시간이 많이 걸려서 몸을 사리게 됐다. 나름의 깊은 좌절을 몇 차례 맛 보니 피하고 싶어 나는 뒷걸음만 치고 있었다.


   좌절을 피해 도피한 곳은 안온하지만 그만큼 재미도 없다. 새로운 게 있어야 재미가 있지 않겠냔 말이다. 지루함을 견디는 시간이었다. 나는 지루함을 견디는 데엔 재능이 없다. 신께서 주신 축복이자 악몽이 아닐 수 없다. 작은 시련에 깊은 내상을 입으면서도 시련 없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성정이란.


   결국 나는 결심에 다다른다. 취미란 걸 공부해보자. 취미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내 취미에 대해 파헤치는 공부의 시간. 취미를 연구하고 선정할 시간을 충분히 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나는 쉽게 무너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뭘 하고 싶었나. 흥미를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충분히 고민해보고 나는 어릴 때의 초심, 구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본어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몇 년째 자리했기 때문이다. 사실 수년 전에 학교 후배에게 아주 기초 일본어는 배운 적이 있는데 그때는 신속하게 해내야 한다는 압박에 스스로 무너져서 결국 손을 금세 놔버렸다. 지금은 다른 마음가짐으로 임한다.


   취미의 공부

   지금은 취미로, 느긋한 마음으로 꾸준히 공부해 보려고 한다. 일주일에 단어 다섯 개 정도만 외워도 1년이 쌓이면 여행 가서 메뉴판 읽을 정도는 되겠지. 여행 가서 이거 주세요, 계산해주세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만 물을 수 있어도 대성공 아닌가.


   코로나가 조금 진정이 되면 퇴사하고 해외에서 한달 살고 싶다. 첫번째 행선지는 태국 치앙마이와 일본 중에 숙고 중이다. 인생은 쉬이 약속할 수 없고 흘러드는 것이니 그때가 되어 봐야 아는 거지만, 때가 되면 잡아채고 싶다. 적어도 언어 때문에 망설이며 “그때 그냥 꾸준히 할 걸!” 후회할 일은 없게 대비를 하고 싶다.


   언젠가 일본어 메뉴판을 읽고 관광지도를 읽으며 아, 내가 그땐 아무 것도 몰랐는데-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마음이 참 흐뭇하다. 매일 구몬 학습지 네 장의 빈칸을 채워넣으면서 내 상상에 색깔을 채운다.


   서른에 새로운 걸 시도하는 건 무서웠지만 막상 해보니 별 것도 아니었다. 헛지랄도 아니었다. 그래도 초등학생 때보다 조금은 성실하고 어른스러워져서, 학습지를 찢어 숨기는 짓은 하지 않는다. 거기에다가 구몬 선생님의 “잘하셨어요!” 한 마디가 그윽하다. 나는 사실 칭찬이 듣고 싶었다.


   칭찬과 성취가 필요한 어른들에게, 학습지로 산뜻한 출발을 권한다. 시작해보니 별 것도 아니었다는 걸 느끼면 다른 걸 새로 시도해볼 힘이 날 거다.


   참고로 나는 내일 유도를 등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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