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챠의 <미세스 아메리카>의 페미니즘과 불필요한 토론을 피해가는 화법
왓챠의 <미세스 아메리카>는 그야말로 혼돈의 집약체다. 여성해방운동과 얼키고 설킨 인종과 성 소수자 문제, 남편에게 학대받으면서도 반 페미니즘을 부르짖는 주부, 본인이 페미니스트인 줄 모르는 반 페미니스트, 분열 속 온건파의 고민, 낙태의 권리... 어딘가 익숙한 이야기들 아닌가? 지금 한국에서 얼렁뚱땅 우당탕탕 싸우는 모든 문제가 섞어 찌개처럼 놓여있지 않은가. 한국의 시끌벅적한 이 페미니즘 논란은 미국에서 70년대에 한 차례 겪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한국이 유별나게 '후져서' 그렇다기보단 과도기란 늘 그렇게 시끄러운 법이다.
이름부터 평등에 가까운 것만 같은 성평등 헌법 수정안(ERA)을 반대하는 여성이 있다고? 그렇다. 그런 입장에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결혼으로 보장 받는 사회의 '보호', 참으로 구색 뿐인 그 한 장까지 빼앗길까 봐 두려운 탓이다. "평등". 이것이 의미하는 바를 상상해본 적도 없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모르는 까닭이다. 그에 반해 무엇을 잃게 될지는 자명한 것 같다. 이혼수당과 양육권을, 남편의 사랑을, 가정을 빼앗기지는 않을까?
덧셈은 없고 뺄셈만 있는 산식에서 어느 쪽을 거머쥘지는 어렵지 않다. 절박해지고 당당해진다. 본인은 행복하다고, 평등을 원치 않는다고 외친다. 페미니스트의 귀에는 개똥 같은 소리지만 결국은 생존하고 싶다는 외침이다.
극중 래디컬의 입장 변화 또한 눈여겨 볼 만 하다. 초창기 극도의 '래디컬Radical', 즉 극단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여성해방운동의 수장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온건에 가까워진다. 끝도 없이 배제하기 때문이다.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서 낙태의 권리는 나중에, 게이 권리는 나중에, 나중에... 나중이 너무 많아져서 온건이 돼버렸다. 좋게 말하면 요령이 생겼고 나쁘게 말하면 의석 확보만 외치는 '의석무새'로 변했다.
"이젠 우리더러 아무도 래디컬이라고 안 하잖아! 우리 괜찮은 거야?"
혁명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피의 수혈이 필요한 까닭이다.
누구는 레즈비언과는 함께 할 수 없다 말한다. 누구는 낙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한다. 또 누군가는 흑인의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자고 말한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중요성과 우선 순위는 다 다르지만 견해를 나누며 정립해가는 것 자체가 여성해방운동이라고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그 '견해'가 설령 안티-페미니즘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의 공론장 개념이 떠오르기도 하는 부분이다. 밀에 따르면 자명한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일수록 비판하는 소수의 목소리를 존중하며 공론장을 형성해야 한다. 토론을 거듭할수록 오류를 발견할 가능성 또는 확고한 입증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해방운동의 이야기가 나올 때 "너 페미냐?"라며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격적으로 을러대는 사람이 있다면 이론적으로는 그 사람을 반겨주는 게 맞다. 그야말로 공론장을 형성하려는 하나의 구성원이니까. 어디까지나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고, 현실에서는 이런 방법이 좋겠다. 철학과에서 주로 교수님들이 학생들에게 하는 당황스러운 질문을 이용하는 것이다. "너가 말하는 페미는 뭐지?"라고 근엄히 한 번 묻는다. 그 다음은 "근거는 뭐지? 보다 구체화 시켜봐!"라고 말하면 된다.
이전에 크리에이터 '이반지하' 씨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매우 인상 깊어서 내 인생의 모토로 삼으려는 말이 있다. "너네는... 너무 설명하려고 해. 그냥 어 그런 거야~ 하고 넘겨버려도 돼." 앞서 말했듯 한국이 지금 마주한 과도기는 시끌벅적하고 혼란하다. 페미의 ㅍ만 나와도 남녀노소 모두 예민해지고 피곤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큰 틀에서는 더 좋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성장통이리라 믿는다. 하지만 사회의 발전이고 뭐고, 개인적으로 지나친 공격적 토론에 지친 이들에게, 교수님식 화법과 이반지하의 말을 바친다. 페미의 정의가 무엇이지? 어 그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