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사모하는 일기
여름 아이.
나는 여름에 태어났다. 엄마는 나를 낳고 이불에 폭닥 쌓여 지냈다. 흔히 94년의 여름이 기록적이었다고 회자되지만 엄마에겐 92년의 여름도 못지않게 더웠을 것이다. 끝내 무더위를 견디지 못해 엄마는 에어컨 앞에 섰다. 그 뒤로 에어컨을 쐰 등이 욱씬욱씬 아프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한여름의 고통으로 엄마에게 찾아들었다. 이전에도 글을 쓴 바 있지만(<나는 기적의 아이> 편) 나는 태어남과 동시에 바닥으로 뚝 떨어져 버렸으므로 엄마는 득녀의 기쁨보다 두려움과 고통이 더 컸다.
다행히 나는 문제없이 걷고 보고 말하고 구구단을 욌다. 내가 어리고 조그맣고 많이 귀여웠을 때 엄마는 내 콧방울을 손가락으로 톡, 치면서 말했다. 너는 여름 아이야. 그리고 <겨울아이>라는 노래를 개사해서 불러줬다. 여름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은... 그 뒤는 언제나 허밍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가사를 모르겠다. 엄마도 가사를 잘 몰랐던 것 같다. 어찌 됐든 여름은 너의 계절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은 성공적으로 닿았다.
엄마의 여름 아이는 여름을 좋아했다. 더위로 얼굴이 발갛게 익으면서도, 심지어는 여름 볕에 팔다리 화상을 입으면서도 여름을 기꺼워했다. 반팔 반바지에 성급히 팔다리를 꿰고 나가도 되는 산뜻함을 좋아했고 가족끼리 자주 가던 옥외 수영장의 파도풀과, 수영장 쉬는 시간에 허둥지둥 먹던 떡볶이를 좋아했다. 수박을 먹고 씨를 퉤퉤 뱉어내면서 여름밤은 깊었다. 어딘가 산사의 냄새 같은 모기향을 맡으면서 온 가족이 거실에서 잠을 청할 땐 모기 물린 자리를 박박 긁다가 깊은 잠에 납치당했다. 게다가 여름엔 방학이 있었다. 여러 모로 여름은 사랑스러웠다. 여름이 나의 계절이라는 게 자랑스러웠다.
질주하는 계절
매미가 쏴쏴쏴 울면 나의 방랑은 시작됐다. 가만 서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와 습도를 헤치고 놀러 다녔다. 엄마는 그런 나를 '공부해야 할 학생이(혹은 열심히 해야 할 취준생이) 공사가 너무 다망하다'며 웃었다. 학생 때는 공부가 하기 싫어서 방랑벽이 도지는 줄 알았는데 성인이 되고 보니 그냥 노는 게 너무너무 좋은 뽀로로였다. 유서 깊은 나의 모험은 여름이면 특히 끝을 모르고 펼쳐졌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여행을 떠났지만 여름에 갔던 곳들이 더 선명히 남았다. 비가 억수처럼 내렸던 무주에서의 가족 여행이라던가, 휴가철을 맞아 형형색색의 튜브가 즐비한 해운대, 내일로 여행에서 녹초가 되어 친구와 마셨던 저녁의 맥주, 한국보다 훨씬 더웠던 나라들에서 마셨던 음료, 싱가포르의 달구어진 모래 같은 것들. 그때도 기쁘고 즐거웠지만 시간이 지나 되새김질을 할수록 점점 미화되어서 몇 곱절이나 더 행복했던 일로 여겨진다. 몇 번의 인상 깊은 일을 가지고 행복을 우리고 우려 여름을 최고의 계절로 꼽다니. 사골 국물 뺨치는 갓성비가 아닐 수 없다.
한두 번의 즐거운 기억은 그다음 여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지난 여름은 참 좋았지. 올해 여름은 또 어딜 가서 어떻게 보낼까. 이런 식으로 내 여름엔 온갖 사람들과 약속이 빼곡히 찾아들었다. 이곳저곳을 빨빨대다 보면 시간은 나와 달음박질 내기라도 하는 듯 가열차게 달려서 어느새 공기에 단풍내가 섞여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면 눈 깜박하는 새 여름은 겨울 뒤에 쏙 숨어 시치미를 뗐고 나는 어리둥절하게 한 살 어른이 되었다.
해를 거듭하며 줄어드는 것과 잃어버리는 것이 참 많지만 여름을 향한 기다림은 여전해서, 늘 여름을 기다리고 만끽하는 사람이 되어왔다. 앞으로도 공고히 그러할 것이다. 나의 수첩에 빡빡하게 일정으로 적혔던 사람들이 여름을 생각할 때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딱히 내 생일을 기억해달란 말은 아니다. 기억해주면 더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