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수요일?
결혼에 환상은 없지만
집에서 꽤 먼 헬스장을 다닌다. 도보 30분 거리다. 공원을 가로질러 걷다 보면 많은 사람과 동물, 서로서로 애정하는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평소엔 걸음이 빠르고 목적지 지향적으로 앞만 보며 걷기 때문에 잘 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운동 후 힘이 빠진 상태로 천천히 걸으면 더 많은 걸 자세히 볼 수 있다. 빠르고 효율적인 걸음도 좋지만 때로는 천천히 걷고 싶다.
오늘 공원의 한 벤치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앉아 계셨다. 할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사탕 포장지를 까서 느리게 할머니에게 건넸다. 할머니 역시 떨리는 손으로 느리게 받아 들었다. 할머니는 사탕을 입에 넣곤 방긋 웃었다. 할아버지도 미소 짓고 있었다. 오가는 시선엔 세월을 묵묵히 이겨낸 애정이 묻어났다. 더없이 다정한 광경이 먹먹했다. 공기는 조금 차고 햇볕은 따뜻하게 쏟아졌다. 두 사람의 벤치에도 햇볕은 축복하듯 자애롭게 떨어지고 있었다.
결혼은 현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 때문인지 나는 결혼에 딱히 환상은 없다. 누구든 변치 않는 관계를 기대하고 결혼을 저지르지만(!) 마음과 관계는 극히 높은 확률로 변한다. 사람과 사랑은 변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된다. 그런 나의 딱딱한 마음을, 오늘의 광경이 조금 녹여냈다. 사람과 사랑은 반드시 변하지만 그렇게 묵어나는 방식이라면 괜찮은 것 같다. 세련되게 말해서 '에이징'이라고 할까.
꼬리가 떨어지겠어
내가 사는 빌라는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면 빠르게 갈 수 있다. 아파트 단지를 거니는데 한 아주머니가 가을의 잘 익은 밤 같은 색의 푸들을 데리고 길에 서있었다. 산책을 하던 중인가 보다, 하고 지나려는데 갑자기 푸들이 꼬리를 프로펠러처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누굴 보고 저리 꼬리를 흔드나 궁금해서 푸들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니 할머니가 짐을 한가득 들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함박 웃는 얼굴로 엄마, 불렀다.
할머니는 연세가 있으신 탓에 빨리 걷지 못했다. 다만 반가운 얼굴로 딸에게 손을 흔들고, 손이 닿기엔 터무니없이 먼 거리지만 강아지를 향해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강아지는 할머니가 완전히 가까워질 때까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눈도 떼지 않고 꼬리를 계속 계속 열심히 흔들었다. 저러다가 꼬리로 공중에 뜨는 거 아니야? 꼬리 떨어지는 거 아니야? 싱거운 생각이 들 만큼.
우리 토끼가 생각났다. 우리 토끼도 반갑고 관심받고 싶을 때 무작정, 그리고 무한정 따라다닌다. 우리가 돌아보고 쓰다듬어줄 때까지. 정말이지 동물들은 직설적이다. 사람처럼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지 않고 좋으면 좋아한다. 덩치는 작은데 표현하는 사랑은 원대하다. 할머니와 아주머니와 푸들은 제각각 행복한 얼굴로 떠났다. 나도 우리 토끼가 보고 싶어져 얼른 집으로 갔다.
오늘 마주한 두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꼭 필름 카메라로 찍고 싶은 광경이었는데. 카메라가 내 손에 있었어도 어차피 사진으로 남기지는 못했을 거다. 핸드폰을 꺼내 찍기에도 몹시 짧은 순간의 광경이었으니. 카메라 렌즈로 보고 담아도 좋은 순간이었겠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내 눈으로 직접 담았기 때문에 훨씬 감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내게 행운이 따라서 앞으로 이런 장면을 눈으로도 카메라로도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