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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밈혜윤 Sep 10. 2022

마늘.깨.장갑.토마토케찹. 사는 냄새.

마트에서 쓰는 일기

   


   예전에 이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쪽지를 발견했다. 누군가 크라운 과자 묶음 할인 코너에서 고민하다가 끝내 과자와 두고 간 쪽지. 쪽지에는 무엇을 사야 하는지 적혀 있었다. 마늘, 깨, 장갑, 토마토 케첩.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났다. 귀엽다. 어릴 때 엄마랑 장을 보러 갈 때면 엄마도 이렇게 사야 할 것들을 쪽지에 적었다. 엄마의 글씨는 바름직하고 힘이 있었다. 내가 쪽지를 적는 날엔 삐뚤빼뚤해서 내가 적었는데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지금은 엄마와 내가 필체가 많이 비슷해졌다.


   우리는 주로 된장과 과자, 과일을 샀다. 현대식 마트를 갔다가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재래식 시장을 갔다가 떡집을 갔다가 했다. 쪽지에 적힌 건 별로 없었는데 집에 돌아가는 길엔 장바구니가 미어터질 때가 많았다. 엄마는 장바구니 여러 개를 접어서 가방 안의 가방을 들고 다녔다. 마트료시카처럼. 아무리 뭘 많이 사도 담을 가방이 없는 적은 없었다. 약 20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는 각종 시장가방을 접어서 가방 안에 넣고 또 넣고 다닌다.


   장을 볼 때 엄마는 엄마만의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선택 기준이 최저가도 최고가도 아니었다. 중간 이상의 가격을 주더라도 엄마 생각에 합리적인 품질이어야 했다. 엄마가 "호박 좀 가져와"라거나 "귤 좀 갖고 와"라고 하면 청과 코너로 쪼르르 달려가서 어떤 게 엄마 눈에 합격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최저가의 물건을 들고 가면 엄마는 면밀히 살펴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비싸도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엄마는 이미 마트 할인 품목과 가격을 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망고를 사 먹었다. 세 알에 9,900원까지 할인했던 망고는 이제 두 알에 7,900원이 되어 있었고 세 알을 묶어 파는 경우가 드물었다. 세 알에 10,000원이거나 두 알에 8,000원이었다면 사 먹지 않았을 거다. 백 원 차이지만 느낌이 괜히 그렇다. 과일은 들이는 돈에 비해 너무 빨리 먹어서, 카트에 담을 때 후- 심호흡을 한 번 하게 된다. 양껏 과일을 먹게 해준 부모님께 새삼스러운 감사를 표한다.

   

   망고에도 뼈라고 불리는 부분이 있다. 몹시 단단해서 뼈를 칼로 가르려고 하다간 자칫하면 피 본다. 뼈에 붙은 과육이 아까울 만큼 망고는 달고 맛있지만,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가 배어있던 대만의 어느 골목에서 사 먹은 것보다 못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기분 탓일 거다. 우리는 낯선 땅에선 쉽게 기대하고 쉬이 용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마트에서 남의 쪽지를 발견한 이야기, 망고가 싸니 비싸니 맛있니 하는 얘기들은 지나치게 시시콜콜해서 요즘 '힙한' 사람들의 이야기 방식과는 영 거리가 멀겠지. 그런데 나는 이런 얘기가 좋다. 너무나 시시콜콜하고 평범해서 기억에도 남지 않을 이야기들이. 내가 사람들에게 친해질 때 묻는 얘기들도 이런 것들이다. 거대하고 방대하고 최고로 멋진 이야기보다 이런 얘기가 그 사람을 더 잘 설명해준다는 생각을 한다. 시시하고 재미없는 일상을 잘 견뎌내는 사람들이 좋다.


   그런 사람들, 시시함을 잘 견뎌내는 사람들은 무얼 이야깃거리로 삼을지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은 것 같다. 그런 시야 덕분에 모두가 겪으며 사는 이야기도 재밌게 또는 울림 있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닐까. 꼭 유용한 이야기, 굉장한 이야기가 아니어도 듣는 재미가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고 보면 재미란 건 꼭 아주 멋진 데에만 있지는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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