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선희 Nov 27. 2019

죽음의 상처를 마주하는 자세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통화 가능?"

좀처럼 먼저 연락을 잘하지 않는 남편이 나와 통화를 하고 싶다는 것은 뭔가 시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의미다. 카톡을 확인하자마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았는데 남편은 아무런 말이 없고 전화기 너머로 주변의 잡음만 들렸다.

"여보세요"를 몇 번 하니 남편이 전화를 받았다.

남편은 "내가 한 거야? 당신이 한 거야?" 하며 내게 물었다. 뭔가 정신없어 보이는 모습이 평소 남편 같지 않았다.

"당신이 한 거야. 무슨 일 있어?"

남편은 "응.." 하고 잠시 쉬었다가 "지훈이 동생이 자살했대. 그래서 지훈이 밥 먹다 말고 급하게 집으로 갔어."


지훈이는 남편의 베스트 프랜드다. 남편의 베스트 프랜드이다 보니 연애 시절 종종 함께 시간을 보냈고 나도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며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다. 지훈이 동생은 두 살 터울로 직장 생활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영업을 여러 차례 시도하고 실패하며 소위 부모의 등골을 빼먹는 자식이었다. 이번에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돈을 요구했고 부모님은 더 이상 줄 수 없다고 하는 상황에서 이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난 것이다.


가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지훈이의 마음은 어떨까?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골칫덩어리 취급받던 가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에 이 일에 대한 자책감과 죄책감이 클 것 같다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남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훈이는 어땠어?"


"지훈이는 아직 슬퍼하기보다는 이런 상황을 만들고 간 동생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마음이 큰 것 같아"


남편의 대답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 다른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지훈이가 동생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 아니었던 건 알고 있었지만 동생의 죽음 앞에서도 분노와 원망을 거두지 못하는 그의 마음을 전부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문득 지난여름 몸의 학교 워크숍에 참여했던 게 떠올랐다. 워크숍 하는 동안 내 나이 고작 29개월에 하늘로 보낸 아빠에 대한 그리움과 슬픔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사진 속 모습이 내 기억 속의 전부인 아빠였다.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자랐을까? 보통의 가정에서 보통의 아이로 자랐을까? 조금 더 행복하게 자랐을까? 답을 확인 할 수는 없지만 늘 머리를 맴도는 질문이었다.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 크게 사무쳐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돌아가신 아빠를 만나기를 요청했고 센싱 세션으로만났다.


37년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던 아빠를 만났다. "아빠~" 달려가 품에 안겨 엉엉 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나 왜 지우라고 했어?"였다.


아빠와 엄마는 혼인 신고도 하지 않은 채 동거 중에 나를 임신했다. 아빠는 경제적인 이유로 나를 낳기를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떠날 테면 떠나라 혼자서라도 아이를 낳겠다'라고 고집을 부렸고 엄마의 고집 덕분에 나는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해주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원망이 폭발하였다.


아버지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모두를 위해서 그런 거야."


이 말을 들은 나는 더 크게 분노하며


"내가 죽는 게 모두를 위한 거야? 그게 왜 모두를 위한 건데? 그럼 나는 뭔데?" 하며 악다구니를 써댔다. 평소에 욕도 잘하지 않던 나는 "씨발. 씨발" 거리며 내 몸 가득한 분노를 쏟아냈다.


엄마의 대역을 맡은 분이 나에게 다가와 나를 감싸 안아줬다. 나는 엄마 품에 안겨 3살 아이가 된 듯이

"아빠 미워. 아빠 나빠" 하며 엉엉 울었다. 엄마 대역은 나를 안아주고 등을 쓰다듬어 주며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내 안의 원망과 분노가 가벼워진 게 느껴졌다.


다시 아빠를 바라봤다.


"왜 이렇게 빨리 죽었어. 아빠 없어서 나 많이 힘들었어." 하며 또 한바탕 울기 시작했다. 울고 있자니 문득 나를 남겨두고 하늘로 간 아빠의 마음이 느껴졌다. 아빠의 나이 26세에 아내와 두 아이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나는 아빠의 마음은 오죽 힘들었을까.


"아빠도 많이 힘들었지?" 하며 아빠를 이해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 아빠 품에 안겼다. 아빠 품의 따뜻함이 느껴졌다. 아빠는 나에게 말했다.

"선희야. 참 잘 컸다. 고맙다."


이 말을 듣는데 내가 살아오며 힘들었던 오랜 시간들을 다 위로받고 인정받는 것 같았다. 이제는 아빠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털끝만큼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아빠 등에 업혀서 놀이 공원도 가고 동네 산책도 하고 운동 경기도 응원하고 카페에서 데이트도 하고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들을 상상 속에서 함께했다. 나의 남편과 아이들도 소개해주고 진한 만남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헤어졌다. 그동안 아빠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으로 늘 결핍감을 가지고 살았는데 희한하게도 아빠와 모든 걸 다 해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빠가 정말 내 가슴에서 나와 함께 있는 것 같았고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워크숍을 떠올리고 나니 지훈이의 모습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어쩌면 지훈이는 동생의 죽음을 건강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원망하고 또 분노하여 그 원망과 분노가 빠져나가면 그 빈 공간에 새로운 마음이 들어찰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삶에 있어서 죽음은 필수적이다.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언제라도 맞닥뜨려야 할 죽음을 가장 잘 마주하는 것은 아마도 내 마음이 가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죽음으로 모든 걸 용서받는 것은 아니며, 죽음으로 모든 걸 용서할 필요도 없다. 그저 죽음을 마주하는 나의 마음을 외면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지켜보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마음의 상처 마주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