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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래의창 Mar 12. 2020

한 시대를 휩쓸어 버린 무서운 전염병, 페스트

[요즘책방 : 책 읽어드립니다] 소개한 흑사병, 지금 주목받는 이유!


지난 화요일 저녁, TV로 읽는 독서 수다 : [tvN 요즘 책방 : 책 읽어드립니다] 에서 알베르 카뮈의《페스트》책을 소개하였습니다. 카뮈의 페스트는 감염으로 인한 집단적 심리까지 정확하게 묘사했다는 평으로, 현재 코로나 19로 인한 여러 상황과 비슷한 듯하여 많은 분들의 공감을 얻었는데요. 그래서일까요? 단시간에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공포의 전염병 '페스트'를 우리는 지금 주목합니다.


역사 속 늘 등장하는 페스트

페스트와 같은 범유행성 질병그 시작과 진행과정이 상당히 유사하게 진행됩니다. 최초의 발병자가 있고, 이후 교통수단을 통해 점점 더 넓은 지역으로 퍼져 나가는데요.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교통수단 또한 발전하면서 전염병의 전파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집니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치명적인 범유행병이 퍼지면 각국은 봉쇄하여 유행병의 감염을 막으려 노력하지만 질병은 어떻게든 바리케이트를 뚫고 들어와 1차 감염자를 만들고, 백신과 치료약이 만들어질 때까지 인류를 괴롭히며 역사를 바꾸어 나갑니다. 계속해서 인류를 위협하는 새로운 질병과 싸우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이겨내야 할 지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방송에서는《페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에 주목합니다. 바로, 낙관적인 태도인데요. 조금 길어도 곧 희망은 찾아오고, 머지 않아 끝날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고요! 희망을 잃지 않는 구성원의 연대와 연합만이 재난 상황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힘' 입니다. 


사진 = 방송 화면 캡쳐

https://youtu.be/wGZwAw4Lcgk

우리가 목격한 역사 속 질병의 파급력,
우리는 어떻게 질병을 이겨왔을까요?

14세기 영국에서 발생한 페스트, 이때만 해도 전염병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폭력적인 행동들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페스트를 벗어나고, 역경을 이겨냈습니다. 과거로부터 이런 전염병은 계속 있었지만 앞으로는 더 이상 고통 없는 세계가 되기를 희망하며,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페스트' 부분을 소개 드립니다.






끔찍한 전염병, 페스트의 시작


유럽 대륙에서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은 재앙은 유럽의 어느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이 끔찍한 전염병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공격했고, 전체 인구 대비 사망자 비율이 지난 2,000년간 있었던 그 어떤 자연재해나 인재, 역병들보다 높았다(두 차례의 세계대전도 포함). 5년 만에 유럽 인구의 4분의 1 내지 3분의 1이 이 질병으로 죽음을 맞이했고(사망자의 수나 비율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시신들 대부분은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불에 태워지거나 구덩이에 한꺼번에 파묻혔다.



제노바 공화국은 현 이탈리아에 위치해 있던 도시국가로, 제노바의 상인들은 14세기 유럽의 경제를 주도할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크림 반도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도시 카파Kaffa(현재는 페오도시야Feodosiya)는 제노바의 상인들이 활동하던 교역의 요충지였다. 그런데 1346년 여름부터 타타르인(몽골족)들이 카파 시를 점령하기 위해 포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파 시를 함락하지는 못했다. 부대 내에 (훗날 페스트라고 불리는) 역병이 돌면서 군인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이듬해인 1347년에는 결국 진영을 철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페스트의 매개.
'쥐벼룩'



쥐벼룩이 페스트의 매개라는 사실은 1894년 스위스의 의사 알렉상드르 예르생Alexandre Yersin이 발견했고, 이후 페스트균은 그의 이름을 따 ‘예르시나 페스티스Yersina Pestis’라는 학명을 지니게 되었다. 페스트의 발병 원리를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우선 페스트균이 쥐벼룩의 소화기에 장애를 일으킨다. 식도가 막혀 아무것도 삼킬 수 없게 된 벼룩은 굶주림을 극복하기 위해 숙주의 몸을 더 열렬하게 뜯으며 피를 빨아먹는데, 이때 벼룩의 위胃 속에 있던, 박테리아에 감염된 내용물들이 침샘에 섞여 나온다. 벼룩은 한 마리 쥐에서만 피를 빨지 않는다. 이 쥐, 저 쥐를 옮겨 다니고, 다른 동물과 인간도 공격한다.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의 희생양이 된 생물은 죽음을 맞이한다. 먼저 쥐들이 죽어나갔고, 그 다음은 사람 차례였다. 페스트균에 감염된 카파 시민들이 대거 목숨을 잃는 사태를 보며 제노바 상인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며 도시를 등지고 떠났지만 그중 많은 이들이 배 위에서 목숨을 잃었다. 


망망대해조차도 페스트균을
막아내지 못했다


스위스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1898년 작품<흑사병 The Pest>


페스트의 증상에 대한 기록


역사학자 카이사레이아의 프로코피우스Procopius of Kaisareia는 페스트로 인한 피해 상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역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재앙에 대해서는 현명한 이들이 이유를 밝혀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일어난 천벌 같은 재앙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신께서 직접 우리를 벌한 것이라는 설명 외에는 그 어떤 이유도 입에 담거나 머리에 떠올릴 수 없다. 그 누구도 어쩌다가 이런 병에 걸렸는지 알지 못했으니, 어쩌면 이상한 몽상이나 꿈이 발병 원인이었을 수도 있다.” 당시 역병에 걸린 이들은 갑작스러운 고열에 시달렸다. 하지만 “피부색의 변화는 없었으며, 일반적인 발열 환자와는 달리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지도 않았다. 열이 분명 나기는 했지만 증세가 매우 미미해서 환자 자신은 물론이고 환자를 검진한 의사조차도 위험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역병 환자들 중 그 누구도 자신이 그 병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병에 걸린 이들 중 어떤 이들은 감염 당일에, 어떤 이들은 다음날에, 또 어떤 이들은 며칠 뒤에 혹처럼 부어오른 종기가 생겼다. 종기는 하반신뿐 아니라 겨드랑이와 귀 뒤 그리고 허벅지에서도 생겨났다. 병에 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 환자들도 있었고, 며칠 뒤에 사망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의 몸에는 콩 만한 크기의 고름집이 생겨났는데, 그런경우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죽어나갔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피를 토하는 이들도 있었고, 그런 경우에도 환자는 곧 사망했다.”


프로코피우스의 기록은 비록 오래되기는 했지만 페스트 증상을 꽤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감염학자들은 페스트의 형태를 증상에 따라 선페스트, 폐페스트, 패혈성 페스트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선페스트bubonic plague로, 사타구니와 겨드랑이, 나아가 신체 기타 부위의 림프절이 극도로 부어오르는 것이 특징이다. 그 종기들은 테니스공만큼 크게 부어오르기도 하고, 내출혈이 일어나 검게 변하기도 한다. ‘가래톳’이라고도 불리는 종기를 오늘날의 수술용 메스와 유사한 도구로 절개했을 때의 단면도가 그림으로 남아 있는데, 중세 말기에 그려진 그림들 속에서 선페스트 종기는 대부분 나무를 쪼갠 형상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선페스트에 감염된 채 아무런 의학적 치료를 받지 못한 이들 중 60퍼센트가 사망했다. 선페스트보다 사망률이 더 높은 것은 폐페스트pneumonic plague다. 폐페스트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로 호흡기관인 폐를 공격하는데,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들 중 90퍼센트가 사망할 정도로 사망률이 높은 질환이었다. 폐페스트는 벼룩에서 쥐로, 쥐에서 사람으로 옮겨가는 전형적인 감염 사슬조차 무너뜨려 버렸다. 이른바 기침이나 재채기를 통한 ‘비말감염droplet infection’ 방식으로 전이되는 폐페스트는 체액을 통해 사람이 직접 다른 사람에게도 옮길 수 있다. 즉 폐페스트에 걸린 사람이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 혹은 침을 튀기며 말을 할 때 옆에 앉아 있다가는 기도를 통해 배출된 페스트균에 감염될 수 있는 것이다. 페스트 형태 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패혈성 페스트septicemic plague로 전염성을 지닌 균이 혈액을 통해 각종 신체기관에 퍼질 경우, 그 당시로서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347년부터 1352년까지 맹위를 떨쳤던 페스트는 환자들의 신체 부위를 괴사시켜 시커멓게 물들였다. 선페스트 환자들의 종기 역시 멍이 든 것처럼 까맣게 변했고, 페스트는 ‘흑사병’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되었다.



전염병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


흑사병이 급속도로 확산되자 사람들은 앞다투어 희생양 찾기에 나섰고, 그런가 하면 세상이 저지른 죄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이른바 ‘고행자flagellants’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중세는 종교의 힘이 강해 페스트가 진노한 신이 세상에 내리는 벌이라고 믿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신을 분노하게 만든 이들을 색출하여 벌하고 싶은 인간의 본능도 어김없이 고개를 들었다. 광신도들의 목표가 된 이들은 이번에도 유대인들이었다. 유럽 곳곳에 퍼져 있던 유대인 공동체는 늘 그렇듯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주범으로 지목되곤 했다. 


1348년 여름,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이 살해당했고, 뒤이어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결정권을 지니고 있던 고위층들은 겉으로 반대하는 척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유대인 대량학살을 저지하지는 않았다. 혼란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범죄들을 눈 감아주는 분위기였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일이 다 유대인 때문이라는 음모론이 많은 이들의 뇌리를 파고들었고, 대량학살이 자행된 도시나 마을의 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독일 남부 콘스탄츠 Konstanz의 성직자였던 하인리히 트루흐세스Heinrich Truchsess는 대량 학살과 관련된 구체적 내용을 담담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1348년 모든 성인의 날All Saint’s Day(11월 1일)부터 1349년 성 미카엘 축일 Michaelmas(9월 29일)까지 쾰른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이 화형을 당하거나 살해당했다.” 그것은 분명 “살해 행위였고, 많은 역사가들은 그 시기에 자행된 범죄의 규모가 나치 정권이 유대인들을 계획적으로 말살하기 전까지 중세 유대인 사회가 맞이한 가장 큰 참사라 말한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당시 수많은 도시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들을 비교적 면밀하게 연구했다. 스위스 바젤Basel에서는 라인 강의 하중도河中島 한 곳에 위치한 목재 건물에 유대인들을 몰아넣고 밖에서 문을 잠근 뒤 건물 전체를 불태워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는 1349년 2월 14일, 미처 도주하지 못한 유대인 시민들이 발가벗겨진 채 공동묘지로 끌려가 살해당했다. 밸런타인데이였던 그날, 마을 전체 주민 1,800명 중 약 900명가량이 몰살당했다.


페스트는 수백 년 동안 유럽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특히 17세기 들어 다시 페스트가 대유행했다.



페스트가 가져온

사회적 여파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 수는 지역별로 편차가 매우 크지만, 역사학자들은 1347년부터 1352년까지 유럽 전체 인구 중 30퍼센트가 흑사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고, 그 수는 대략 1,8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한다.15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6세의 지시로 시작된 어느 조사에서는 흑사병으로 인한 사망자의 수가 정확히 4,283만 6,486명16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이 수치는 지나치게 높게 책정된 듯하다. 한편, 흑사병은 분명 엄청난 인명피해를 불러왔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사회적, 경제적 상황이 호전되는 이점을 누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여 모든 분야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졌던 것이다. 이에 따라 살아남은 수공업자나 농부들은 그 이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유리한 위치에서 거래처나 지주들과 협상할 수 있게 되었다. 서유럽과 북유럽을 비롯해 유럽 내 수많은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했고 농노를 구하기 힘들어져 노예를 부릴 수 있는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았다. 생필품 가격도 일시적으로 상승했으나 이내 하락했다. 1347년 이전에 비해 인구가 현저히 줄어들었기 때문에 식량 부족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중세 시대의 인구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계층은 농민이었는데, 할당 받은 토지의 면적이 너무 작아서 자신의 사망 후 장자長子에게만 겨우 물려줄 수 있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1450년 무렵에는 모든 자녀에게 나눠줄 수 있을 정도로 할당 받는 토지의 면적이 넓어졌다. 역사상 처음으로 딸들에게도 땅을 물려줄 수 있을 정도였다. 흑사병이라는 대재앙이 이러한 긍정적 효과를 불러온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역병이 번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대부분 지역은 기근과 빈곤에 시달렸다. 몇몇 지역은 인구 과밀로 매우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가 발전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1352년 이후 인구수가 급감하면서 살아남은 이들은 이제 제한된 자원을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수확량이 적은 토지들은 목초지로 전환시켰고, 기술 혁신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기 시작했으며, 방앗간의 수도 늘어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제 곧 다가올 미래를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한 세기 내내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었지만
유럽은 결국 페스트라는 납골당에서 벗어났고,
비온 뒤에 해가 비치듯 역병을 딛고 굳게 일어선것" 이다.




* 본 포스팅은 도서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 를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그럼 여러분, 코로나 19로 뒤숭숭한 요즘 

꼭 건강 유념하시고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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