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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선생님 Jan 01. 2021

저 이제 고등학교 가요!

우리의 5년을 추억하며.

언어치료 현장에서 가장 마음이 뭉클할 때는 아동의 언어발달에 진전이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아동이 청소년이 되고 졸업을 하는 과정을 보는 것이다. 어느 덧 10년동안 아이들과 함께 하다 보니 여섯 살 때 처음 만났던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어있고, 중학생 때 만났던 학생은 대학생이 되어 있다. 누군가의 성장 과정에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축복인 것 같다.




L군을 만났을 때는 2015년 여름이었다. 나는 당시 아주 교만한 5년차 치료사였고 직장 생활을 하는데 여러 자격지심을 느끼며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석사를 졸업하지 않았을 때였지만 그래도 석사 수료를 한 이후에는 병원 정규직에 취업을 하거나 사설 기관이여도 단가가 높은 곳에 취업을 하고 싶었는데 현실은 복지관에서 서류와 씨름하는 직원이었다. 출산 이후에 돌이켜 생각해보면 복지관 직원 또한 나에게 과분한 자리였는데 당시에는 나의 교만함 때문에 감사한 것들이 보이지 않았다.


서류에 치여서 갈팡질팡하고 있던 어느 날, L군이 아버님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내가 수료했던 대학원 언어치료실을 다닌 경험이 있었고 무엇보다 같은 종교를 가지고 있어서 더 마음의 문을 쉽게 열 수 있었다. L군은 장애 진단명을 받지 않았지만 학업 수행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의 맞벌이로 인해서 스스로 버스를 타고 4계절 내내 나와의 수업을 위해 복지관에 왔다. 


학교 이야기, 또래 이야기, 가정 이야기를 벽 없이 나눌 수 있었지만 내가 이끌어가야 할 것은 '수업'이었다. 한 회기 안에 어휘, 구문, 맞춤법, 대화를 모두 다루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나는 20대였고, 머릿 속 한 켠에는 '연애' 생각, '결혼 준비' 생각이 차지하고 있었을 뿐 '양육'에 대한 고민은 전혀 하지 않을 때였다. 도도하고 샤랄라 원피스를 입고 출근하면 엔돌핀이 솟는 어린 치료사였던 것 같다. 아이를 양육해보았다면 L군의 맞춤법 실수나 주의집중에 대한 어려움을 조금 더 부드럽게 다독여줄 수 있었을텐데. 

때로는 모든 실수를 L군의 탓으로 돌리기도 했고, 답답함을 표출하기도 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럽다. 잘 하려고 했던 그 노력을 왜 읽어주지 못했을까. 서류에 치여서 나는 얼마나 수업 준비를 매번 성실하게 했을까. 퇴사를 하고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하고 난 후에야 깊이 반성할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출산 후 복귀한 직장에 L군이 왔다. 중학교 2학년 사춘기 청소년의 모습으로. 어느덧 키는 나보다 10CM는 더 커보였고 목소리에서 무게가 느껴졌다. 좋아하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 문자 답장에 대한 이야기부터 신문기사, 주제별 어휘리스트를 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프리랜서 치료사의 장점 중 하나는 서류 강도가 그나마 낮다는 것이였는데, 지난 시간들을 반성하는 의미였는지 정말 최선을 다해서 수업을 준비했다. 사회 교과서 관련 어휘, 사회적 이슈를 정리하기도 하고 L군의 수업 내용들을 모아서 한 권의 소책자로 묶어주었다. L군은 어떠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나름 뿌듯했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찾아왔고, 작년 한 해는 L군과 수업을 많이 진행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혼자 버스를 타고 기관에 오는 것이 여러가지 염려가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대로 한 해를 마무리하기엔 너무나 아쉬울 것 같아서 지난 수요일 수업을 진행했다. 


"고등학교 계획 세워본 적 있어?" "아니요." "그럼 나랑 같이 해볼래? 당장 생각하기 어려우면 집에서 채워와도 돼!" 우리는 코로나 관련 신문기사를 읽고 해석한 후에 고등학교 계획표를 만들고 채워나갔다. L군은 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중식 요리사, 플로리스트, 기관사 등. 곁에서 함께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남은 3년의 시간 또한 함께하고 싶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준 것 중 하나는 '시간의 앞당김'이 아닐까 생각된다. 작년 하반기 내내 고민하다가 생각한 것은 '온라인 ZOOM 언어치료'였다. 이미 ZOOM으로 언어치료를 진행하고 계신 선생님이 많다. 나는 사실 기술력이 많이 부족하다. 


만일 가정에서 방치되어 있는 청소년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어휘 촉진이 필요하다면, 사회적 이슈를 함께 읽어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면 시도해볼만 하지 않을까?


언제쯤 설문지 링크를 부모님들께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수요가 있을까, 잘 할 수 있을까, 나의 아이는 잘 따라와 줄까(어린이집 등원/취침). 고민이 많은 2020년의 마지막 날, 그리고 2021년의 시작이다.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한 가지 바람은 초등학교, 청소년기를 치료실과 병행하며 보낸 친구들이 사회인이 되었을 때에도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맞는 예인지 모르겠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 중에서도 상담을 받는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아동 언어치료실을 찾기 어렵다면 온라인 상담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언어치료실 안에서 1대1 관계를 쌓아가는 것은 어떨까? 여러가지 고민이 많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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