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쏠로 딱지를 떼다.

연애, 결혼 이후가 진짜 사랑의 시작이었다.

by 말선생님

#Intro.

언젠가, '부부는 살아가면서 둘만의 시간을 추억하는 힘으로 육아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공감되는 말이다. 둘이 사랑해서 맺은 결실이 '아이'인데, 아이가 커가는 과정 중 일정 기간은 부부 사이가 멀어진다. 상담을 받으러 오는 부부 중, '5년 차'가 가장 많다고 한다.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우리 부부는 올해 결혼한 지 5년 차에 접어들었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사랑해서 아이가 생겼는데'. 아이가 돌이 되기 전까지는 서로의 마음을 돌볼 겨를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친정 찬스로 둘 만의 시간을 갖게 되어도, 수유 때문에, 아이의 생활 패턴 때문에, 또 제한된 시간(친정 부모님도 마냥 아이만을 봐주실 수 없다) 때문에. 서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은 극히 제한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1. 소개팅 실패녀.


나는 남편을 소개팅으로 만났다. 같은 교회 소속 청년이었지만 나와 남편은 서로 만난 적이 없었다. '공주 선교팀 팀장이 참 대단하다'라는 평 정도 들었던 것 같은데. 같은 교회 안에서 배우자를 만나는 게 1순위 기도제목이긴 했지만 그 기도제목이 정말 이루어질 줄은 몰랐다.




남편을 만나기 몇 달 전, 대학교 때부터 알아온 선배와의 미지근한 관계가 정리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선배는 나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는데 나는 그 선배가 밤에 자주 연락한다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관심이 있다고 착각하고 만나고 나면 마음이 뒤숭숭해져 있었다. 이후에 들은 고백이지만 선배는 나에게 아주 잠깐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대학교 때의 내 모습은 남자들 앞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공부가 중요했고, 마지막 학기까지 좋은 성적을 받는 내 모습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왜 그렇게 갇혀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외모로 나를 드러내기에는 내가 생각해도 내 모습이 살도 찌고 치마도 한번 입어본 적이 없으니까. 공부로 나를 내세우려고 했던 것 같다.

싸이월드 속 내 모습은 멋을 낼 때는 렌즈를 끼고 긴 생머리를 한 적도 있었지만 늘 청바지에 면티를 입고 있었다. 대학교 2학년 때, 큰 맘을 먹고 달라붙는 바지를 입기 위해 옷가게에 갔지만 맞는 바지가 없어서 크게 충격을 먹었다.

그 뒤로 매일 저녁 학교 주변을 산책하고, 야식을 줄이고 내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살은 쉽게 나를 떠나가지 않았다. 그 살들은 신랑과 연애를 하며 혹독한 직장 생활을 겪었을 때, 그리고 육아를 하면서 조금씩 떠나갔다는 슬픈 이야기.




대학교 졸업 이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몇 번의 소개팅이 있었지만 에프터를 받은 적은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이상한가?'. 석사 입학 직후에 깨닫게 된 사실이지만 나의 낮은 자존감이 문제였다. 낮은 자존감이 회복되지 않은 채, '저 남자가 나를 어떻게 볼까?' 이 마음으로 소개팅 자리에 앉아있는 내 모습을 상대방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심지어 이런 질문을 상대방에게 던진 적도 있었다. "저 재미없죠?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요."


소개팅 실패 이후 교회 동생이 보내준 동영상을 보고 나서야 답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었다. 소개팅은 교회 오빠가 아니라 '이성'을 만나기 위한 목적의 자리니, 신앙적인 이야기보다는 내가 '여자'로 보여야 하는 자리라는 것을. 그리고 나를 적절하게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아, 대학원 가기 전에 그 동영상을 보았어야 하는데. 당시 강의를 해주셨던 강사분은 내가 결혼을 할 당시 tv 출연도 하시고 책도 내신 아주 유명한 분이 되셨다.)





다시 선배의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엄청나게 자존심과 자존감 모두 스크래치가 난 기분으로, 거의 한 달 뒤에 또 한 번의 소개팅을 했다. 결과는 몇 번 식사를 한 것으로 '우리 사귀자'는 제안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끝이 났다. 이 분에 대한 이야기는 오픈하지 않는 걸로... 발렌타인 데이 때 내가 밥을 사고 내가 초콜릿을 주면서 호감을 표현했는 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으니. 그냥 속된 말로는 '까인 것'이었다.


그 이후 특별 새벽기도회가 있었다. 거의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기도회였는데. 단순히 남자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정말 심각하게 나를 돌아보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지전능하시다는 하나님은 대체 왜 내 연애에 관심이 없으실까. 너무 바쁘신가? 평생 독수공방 하며 살아야 하나?


언젠가는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듣기 힘들어질 때였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각자 연애를 즐기고 있었으니까.





기도회 끝에 답을 얻었는지 아닌지는 확신이 없었지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대학원 생활 중 가장 바쁘다는 3학 차에 들어갔다. 아는 언니네 집에서 한 학기를 보낼 계획이었는데 너무 바빠서 결국 고시텔로 거주지도 옮겼다. 아직 분당으로 친정집이 이사 오기 전이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같은 셀 오빠에게 주중 찬양집회를 함께 가자고 연락이 왔다. 곧 중간고사여서 가고 싶은 마음이 썩 들지는 않았지만 왠지 가면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예배 이후 함께 짬뽕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청년부에서는 빠지지 않는 주제인 '연애'이야기가 나왔다.


"오빠, 나 남자 친구 너무 사귀고 싶어요! 소개해 주세요."

"이상형이 뭔데?"

"음, 설교시간에 필기하는 남자요."


그런데 이 오빠가 갑자기 연락처를 찾더니 한 명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며 전화를 걸었다. "응, 나 ㅅㅇ 형이야. 여자 친구 있니? 아, 그래? 그럼 내가 연락처 남겨줄게. 응, 연락해봐!".



#2. 첫 만남.


아무리 연락을 기다려도 연락이 오지 않는다. '그래 나도 바쁘거든! 바쁜데 뭐!'. 그래도 보통 연락처를 받고 상대방에게 1주일 이내에 연락을 주는데. 이 사람은 소개팅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그 사람 연락 없었어요. 저도 바쁘거든요. 그냥 안 만나도 돼요. 다른 사람 소개해 주세요, 나중에."


ㅅㅇ오빠는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며 주선자가 아닌 형으로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었다고 한다.(이후의 증언에 의하면). 아무튼, 그 통화 이후로 우리는 만나게 되었다. 2014년 4월 17일. 출근하는 날이었던 터라 퇴근 이후 신랑이 나를 데리러 왔다. 비 오는 날, 신랑의 차가 있는 곳까지 신랑이 씌워주는 우산을 쓰고 차를 탔다.


"여기가 제가 일하는 학원이에요?"

"아, 저 여기 8층에서 작년에 근무했었어요. 혹시 언어치료 아세요?"

"어머, 우리 같은 층이었는데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너무 교회 오빠 같지도 않게, 또 너무 이성적으로 어필하려는 듯한 느낌이 들지도 않게. 그렇게 대화가 흘러갔다. 지금은 신랑이 안정적인 곳에서 근무를 하고 있지만 당시 신랑은 학원 강사와 과외 교사로 유명했다(고 한다). 서로 한창 바쁜 시기에 어쩌다가 시간이 맞아서 만났던 날이었다. 한 사람이라도 시간이 되지 않아서 못 만나겠다고 했다면 1대 1로는 만나지 못했을 그런 인연.


(2014년 4월은 아픈 달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새로운 만남이 시작된 달이었다. 우리의 대화도 그런 이야기도 나왔던 것 같다. "아이들 무사할 거예요.")



#3. 이제 '모쏠'이 아니다.


신랑은 소개팅 이후 한 두세 번 정도 대학원 근처로 찾아왔다. 그리고 나도 신랑의 오피스텔 근처에 가게 되면 우연인 척 연락을 했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애프터 신청이 소개팅 이후에 오지 않았지만, '이런 게 에프터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공부를 하다가 만나도, 허름한 옷을 입고 있어도, 백팩을 메고 있어도, 나 자신이 크게 주눅이 들지 않았다. 새벽기도의 효과인가?


정확히 소개팅 일주일 이후 신랑이 나를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당시, 나의 친정은 곤지암에서도 더 들어간 산골에 있었다. 너무 시골이니까 곤지암 터미널까지만 데려다 달라고 했다.


사람들은 '차 있는 남자'가 좋다고들 하는데 나는 차가 왜 좋은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뚜벅이가 익숙했고, 살을 빼기 위해서라도 대중교통을 타는 게 익숙했다. 차 있는 남자가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그건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을까). 소개팅 당일도 역 근처에 내려달라고 했다. 고시텔 근처에서 내리는 게 살짝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있었지만 나를 위해 상대방이 차를 움직이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내가 피해를 주는걸 조금이라도 견디지 못하던 나였던 것 같다.


터미널에서 내려주면서 신랑이 고백을 했다. 만나보자고. 마음속에서는 기쁨의 환호성이 들리는데. 표현이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2014년 4월 25일. 첫 남자 친구가 생겼다.



#4. 연애의 시작은 내면의 싸움과의 시작이었다.


남자 친구가 생겼다는 건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어깨가 들썩이기도 하고 내 자존감이 100배는 더 상승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나의 마음이 점점 보일 때마다 그걸 받아들이는 게 너무 힘들었다. 지금 남자 친구를 만나고 싶은데 남자 친구는 항상 바쁘다. 연락이 자주 없다.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 내가 이걸 표현하면 상대방이 부담스러워서 날 떠나가면 어떻게 하지?


쓰디쓴 소개팅의 잔재가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연락 부분에 있어서는 신랑과 나의 가치관이 달랐다. 신랑은 평생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가정환경 안에서 자랐다. 나는 하루 혹은 이틀에 한 번씩 엄마에게 안부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청소년기와 20대를 보냈다. 연락 부분으로 가장 많이 싸웠지만 그러면서 많이 다져지게 되었다. 신랑의 변화에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감사하다.


내 마음을 지혜롭게 표현하는 게 중요했다. 그런데 그 방법을 잘 알지 못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도 많이 구했다. 물론, 사람들마다 던지는 답은 다 달랐다. '네가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조언이 가장 많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표현이 아니었는데.



#5. 가장 큰 선물을 받다.

신랑과 결혼 준비를 하는 과정 가운데, 육아를 하는 가운데, 짐가방을 몇 번 싸고 풀고 하면서(나 혼자...) 숱하게 많이 싸웠지만, 다시 2014년으로, 2015년으로 돌아가면, 신랑은 나에게 '자존감'이라는 큰 선물을 주었다.


"오빠, 나는 고시텔 살고, 오빠는 큰 오피스텔 사는데, 나 진짜 괜찮아요?"

"오빠, 나 아직 학생인데 괜찮아요?"

"오빠, 나 뚱뚱해 보이지 않아? 괜찮아?"



신랑의 대답은 항상 "뭐, 어때"였다. 괜찮다고. 그게 나 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언젠가 신랑과 함께 여행을 갔는데 문득 '불안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신혼 1년 차 때였는데. 신랑이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결혼 상대자가 신체가 불편한 사람이어도 결혼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고.


당시 복지관에서 전일제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내 머리와 마음속에 너무나 깊이 내려온 말이었다. 여전히 나는 남 의식이 중요하고 상대방도 남의 시간에 따라 맞추려고 하는데.



#6. to be continue...


이렇게 적다 보니 엄청 로맨스가 넘치고 사랑이 넘치는 부부로 포장된 것 같다. 사실, 아까도 돈 이야기가 나아서 살짝 말다툼이 있었는데. '연인'에서 '부부'가 되면, 또 그 부부 사이에 '아이'가 생기고 '부모'가 되면 아예 챕터가 달라진다고 한다. 지금은 매우 혼란스러운 과정을 걸어가고 있지만. 이 또한 언젠가는 이렇게 아름답게 적을 수 있을까.




2016년 7월, 우리가 입덧도 아이도 없이, 자유롭게 갔던 군산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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