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마치고 신랑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이가 서럽게 우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오늘 친구들이 모인다고 하는데, ㅇㅇ(아이 이름)이는 나중에 오라고 했대." 이제 막 인생 8년차인 아이, 또래 관계를 배워가는 아이가 이런저런 사정을 파악할 리가 없었다. 그저 속상하고, 친구들과 놀고 싶은 마음을 스스로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 급히 버스를 타고 집에 오자마자 아이를 달랬다. "최근에 ㅇㅇ(이)가 독감에 걸렸었잖아. 그래서 아직 다 나은 걸 모르는게 아닐까? 엄마, 아빠랑 대신 예쁜 카페 갈까?" 다행히 인생 8년차이기에 아이의 서러움은 생각보다도 빨리 누그러졌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 친구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남아있다. 그 시작은 시골로 이사를 오면서 시작되었다. 한 학년에 한 학급씩,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을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돌아가면서 따돌림을 당했고, 돌아가면서 가해자가 되었다. 남들은 도시로 나간다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무렵 우리는 시골로 들어왔다. 시골 아이들이 순하다는 썰은 다 거짓이라 생각했다. 여러 일이 있었는데, 결론은 내 자식만은 시골에서 키우지 않겠노라는 결단을 세우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에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대학교 때 기독교 동아리에서도, 결혼 예비학교에서도, 그 외의 직장인 워크샵, 프리랜서가 되어서 받았던 심리상담 속에서도 늘 받았던 질문. 나도 모르게 Isfj라는 MBTI에 갇혀서 '나는 갈등을 싫어하는 사람', '속 마음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가두고 있었다.
언젠가 지인의 질문으로부터 나 스스로에게 물음표를 던졌다. 정말 나는 그런 성격일까? 어릴 때의 성격은 나서기 좋아하고, 남들을 이끌기 좋아하고, 스스럼 없이 발표하기를 즐겼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 모습이 누군가에게 '재수없게' 느껴질까봐, 입을 닫고 참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그게 재수없는 행동이었으니까. 성장하면서 당당하게 교실 안에서 자신의 궁금증과 의견을 말하는 누군가를 보면 나도 그 모습을 곱게 보지 못했다. 내 마음 속에도 상처가 섞인 판단이 자리잡았던 듯했다.
"좀, 가만히 있어. 너무 시끄럽잖아."
나도 모르게 내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하는 부모가 되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를 즐기는 아이에게, 자신감 있다고 칭찬해주기보다 '나는 그 모습으로 인해 따돌림을 당했으니,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이 아이를 다그치는 말로 나왔다.
이뿐일까. 우리는 모두 말에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내 아이에게 그대로 흘러간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어른과 작은 행동에도 지지와 사랑을 받아온 어른 중 누가 더 자녀에게 인정하는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후자라고 완전히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사랑을 받아본 경험을 가진 성인이 사랑을 줄 수 있다는 말은 지금까지 살아보니 어느 정도 사실이라 여겨진다.
언제부터인가 상대방을 판단하기 전에 상대의 살아온 과정을 먼저 생각해보려고 한다. 성장 과정을 오픈하기까지 친밀도가 생기지 않았다면, 상대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도록 스스로 제어 버튼을 누르려고 노력한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남편도, 내 곁에 있는 사람들도,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 말하지 못할 상처를 가지고 있다. 어떠한 성장 과정, 또래 관계, 삶의 여정을 걸어왔는지는 당사자만 알 수 있다. 상대방의 말투와 말 자체로 인해 상대를 판단하기는 조금 이르다.
사회 초년생 시절, 교회 안에서 심리 상담사가 성향을 분석해주는 봉사를 하러 와주셨다. 기질을 분석해주셨는데, '우울질'이라는 프레임 안에 나와 유사한 결과를 나온 청년들을 가두었다. "이 기질은 우수질이라고도 하는데요. 우울질이에요."
"그럴 줄 알았어."
"어쩐지 조용하면서도 힘이 있더라."
"머리가 좋아서 그런거 아니야?"
여러 말들이 섞여나왔지만, '우울질'이기에 조용하고 재미가 없다라는 프레임이 꽤 오래 갔고, 지금도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말을 할 때 눈치를 많이 보는 사람,
눈치를 너무 보지 않는 사람,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
할 말은 하고 보는 사람 등,
우리는 저마다의 인생 히스토리를 가지고 말을 한다. 다만, 그 포장지를 만든 과정은 보이지 않고 포장지만 모일 뿐이다. 그렇기에, 기질을 함부로 파악할 수도 없고, 상대의 말로 인해 상처를 깊이 받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어린 시절, 말하기를 즐기고, 사람들을 웃기고 싶어하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만나서, 너 참 재미있다고, 씩씩하다고,
그렇게 말해주는 어른이 되어주고 싶다.
지금 내가 도울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다그치기 보다 들어주고, 강점을 발견해주는
그런 언어치료사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