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아이의 말을 기록하며.
"아빠, 어린왕자 작가님 이름은 '생쥐 팩토리'예요?"
아이가 지난 3월 무렵부터 잠자리 독서로 읽었던 <어린왕자> 책의 전시를 보면서 천진난만하게 묻는다. 아이의 아빠는 다정하게 답해준다. "어린왕자 작가님 이름은 '생.택.쥐.베.리.'야~!"
어린 시절, 나도 어린왕자 작가님의 이름을 보면서 여럽다고 생각했었는데, 8살이 된 아이에게도 한번에 읽히지 않는 이름이었나보다. 가평 여행을 하면서 아이의 말 한마디 한 마디를 보고 들으면서, 아이의 말을 모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아이는 더 어릴 때부터 말 만들기를 좋아했다. 엄마의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추는 모습을 처음 보면서 "눈거울"이라고 하고, 지나가는 구름, 꽃, 벌레의 이름을 만들어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억지로 되지 않는 창의적인 그 무언가가 아이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또한 돌이켜 생각해보면, 누구에게나 있었을 시절인데 세상의 물이 들면서 점점 그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기분이 좋은 때에는 아이의 말에 대답을 잘 해주지만 하루종일 아이와 함께하는 주말, 바쁜 평일, 자기 전엔 아이의 말을 가로채거나 막은 적도 많았다. 그러지 않았어야했는데 늘 후회는 남지만 지금 당장 아이가 말을 건다면, "엄마 지금 이거만 쓰고 해줄게."라고 답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놓친 아이의 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민들레꽃씨가 하늘에 날아가듯, 아이의 말도 휘발되었을까 미안해진다. 민들레꽃씨는 꽃을 피우니, 아이의 말도 잎이 자라나고 줄기가 단단해지고 열매를 맺었으면 좋겠다. 부모와 선생님은 양분을 주는 역할을 하면서.
언어치료사 5년차 무렵, 당시 결혼도 하지 않은 싱글이었기에 어머님들은 반신반의한 눈빛을 주시곤 했다. 이전 치료사 선생님이 출산으로 인한 퇴사를 하셔서 더 그러했을 수도 있겠지만, "아이 키워보셨어요?" 뉘앙스의 말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지나고 아이를 '키워보니', 그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하고, 여전히 잔재가 남기도 한다. 당시에 한 어머님께서 '아이라는 말을 함부로 하시지 마세요'라는 문자를 주신 적이 있었다. 상담 때 오시지 못해서 문자를 통해 수업 내용을 전달드렸는데, 그때 적은 '아이'라는 말이 조금 언잖으셨던 것 같다. 이제 막 대학원을 수료하고 연애의 재미에 푹 빠진 내가 그 마음을 어찌 이해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내가 추측한 어머님의 의도가 100%가 맞는지 여부는 확신할 수 없다.
서론이 길었지만 나도 '아이'라는 말보단 '어린이'라는 단어가 더 좋다. 아이라는 말은 무언가를 가르쳐야만 할 것 같고 어른이 더 이해를 해야할 것만 같지만 어린이는 모든 전제를 바꾸어준다. '존중받는다'를 디폴트로 어린이를 대하게된다.
언어치료 현장에서는 '어린이'를 어린이로 대하지 못할 때가 생각보다 더 많았던 것 같다. 치료사 스스로가 '장애'라는 전제를 더 크게 갖기도 했고, 아이의 의사소통에 대한 어려움을 돕는다는 큰 전제는 잊은 채 작은 활동에 몰입하게 유도하기도 한다. 모두 나에 대한 이야기이자 반성이다. 어린이는 그 자체로, 장애의 유무를 떠나서 존중받아야 하고 자신의 의사를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목표가 더 크게 보여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친 나의 과오였다.
치료실 안에서도 놓친 어린이의 보석같은 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비록 매 순간 적어내지는 못했지만, 그 순간과 분위기는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한다. 세상에 눈을 돌리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 순간만큼은 웃음 소리가 치료실 밖까지 들리면서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어린이의 말, 더불어 육아하는 순간의 즐거움을 글로 쓰기가 조심스러워졌다. 누군가는 그런 메시지를 담은 글에 공감하지 못할 수 있으니까.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자녀 양육에 대한 설교가 혹, 자녀가 없는 부부에게는 공감을 주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신랑에게 전했을 때 신랑은 "그래도 어린이 주일이잖아."라고 답했다. 맞다, 어린이. 어린이는 부부의 어떤 상황에 관계 없이 존중받고 어른이 귀기울여주어야 할 어린이니까.
말에 대한 연재를 하면서 나의 말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나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닌데 너무 포장되는 것은 아닐까, 이전에 나의 말로 인해 상처받은 누군가가 떠오르기도 했고 나 역시 서로 갈등을 가졌던 상황들이 떠오르면서 화 버튼이 눌리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아이를 보면 이런 복잡한 감정들이 싹 잊혀졌다. 그만큼 아이의 말에는, 어린이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이 앞에서는 말에 대한 좋은 교사가 되어야 할 것 같은 그런 마음가짐을 갖게했다. 어린이의 말이 더 많이 기록되고 존중받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