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섬역에 다녀오며.

자존감이 회복되어서 찾아간 곳.

by 말선생님

오래간만에 뚝섬역에 다녀왔다. 근처에 살아본 적도 없고, 그저 자주 지나다녔을 뿐인데도 나에게는 매우 의미가 있는 곳이다. '오늘은 나에게 의미가 있는 곳에 가는 날'이라고 생각하고 간 건 아니었는데, 미팅을 마치고 바라본 뚝섬역 안내판은 지난 추억들을 떠올리게 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세울 것은 '열심'이 전부였던 나는 당시 삼촌이 근무하는 이 역 근처 대학교의 국어교육과에 가고 싶었다. 삼촌께 학교 안내책자를 받으면서 책 안에서 캠퍼스를 거니는 언니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되는 모습을 상상하며 도서관을 오갔다. 2005년 겨울, 학교에서 가고 싶은 학교에 다녀오라는 숙제가 있었는데 엄마와 함께 시골에서 이 곳을 지나서 그 학교에 갔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 우리 집은 면 소재지였는데, 차로는 서울과 많이 멀지 않았지만 대중교통은 밤 10시면 막차가 끊기는 곳이었다. 집-곤지암-광역버스를 타고 경기도 광주 시내를 돌고 돌아서야 강변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능에 대실패를 하고 난 후, 2호선 근처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가지 않는다면 시골에서 서울로 나올 일은 없었지만 엄마와 2호선을 거쳐서 어딘가를 가야 했던 날도 지하철이 정차하고 문이 열고 닫힐 때마다 '너는 실패자야'라고 안내방송 멘트가 나오는 것 같았다. 나의 2~3년의 노력이 좌절되었다. 친구 사귀는 것도 포기하고, 모든 고3이 그렇듯이 살을 중학교 때에 비해서 10kg 가까이 찌워가며 공부했던 시간들을 되돌리고 싶었다. 내가 찾아낸 최고의 위안은 '반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2호선을 타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 곳에 오리라 다짐했다.


대학을 다니다 보니 전공이 나와 꽤 잘 맞았다. 그런데 지방대에게 서울이란? 자존감이 낮아지는 곳이었다. 대학교가 있던 곳도 나름 도시였는데, 서울에 대한 로망을 버리지 못한 나의 마음의 문제였다. 이번에 찾은 자존감을 높이는 대안은 서울로 취업을 하는 거였다. 한강 너머로 보이는 저 대학병원에 취업을 한다면, 아니 저 학교 대학원에 진학을 한다면 무언가를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현실은 나에게 그러한 과정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는 것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취업은 대학교를 다니던 곳보다 더 읍내로 첫 직장을 얻었고, 대학원은 서울에서는 거리가 조금 있는 곳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신께서는 내가 지역이나 타이틀을 통해서 자존감을 높이길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연애하던 시절의 뚝섬역 근처는 그래도 20대 초반에 느꼈던 좌절감을 보상받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다. 신기하게도 신랑은 내가 가고 싶었던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길치지만 이쪽 근처의 길은 거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디로 갈지, 무엇을 먹을지 장소만 정해지면 얼마든지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다. (지금은 아이 없이 단 둘이 하루 종일 데이트를 즐기는 그 느낌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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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고 난 후에는 논문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시는 직장도 지금처럼 프리랜서가 아니라 풀타임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실험을 돌리려면 휴가를 내거나 0.5차를 내거나, 0.25차를 내야 했다. 아니면, 주말 시간을 그대로 반납해야 했다. 운 좋게 이 곳 근처의 주민센터 사회복지 공무원분께 연락이 왔다. 동네 아이들의 언어 검사를 의뢰해주셨다. 무거운 검사도구를 짊어지고 퇴근하자마자 왕십리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당시 공무원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졸업하면 여기 근처 병원으로 취업해보세요. 복지관에 계시기 너무 아깝잖아요." 안 그래도 졸업하면 복지관을 당장 퇴사하고 싶었다. 대학병원 취업, 혹은 인 서울 권 어딘가로 이직을 하면 행복한 앞날이 왠지 내 앞에 펼쳐져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논문 실험을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는 분당을 떠나서 잠시 일산으로 집을 옮겼다. 이직의 꿈은 이루었으나 임신 전보다 계약 조건이나 위치는 훨씬 열악했다. '아, 신께서 또 나의 욕심이 잘못되었다고 알려주시는 건가.' 임신을 하고, 막달이 되어서, 친정 근처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다시 분당에 왔지만 출산 이후로는 거의 이 쪽을 방문할 일이 없었다.


그 공무원 분께서 말씀하셨던 병원에서 계약직 채용 공고가 났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아니, 육아를 하면서 그곳을 다니려면 아이와 나는 그곳에서 주는 페이보다 훨씬 더 큰 스트레스와 등하원비를 감당해내야 했다. 또 아이 때문에 무언가를 포기해야 하는 내 삶에 좌절감이 찾아왔지만 아직 36개월도 되지 않은 아이를 아침 7시 30분에 등원해서 저녁 7시 30분에 하원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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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8월의 나는, 불과 5년 전보다도 훨씬 더 자존감이 회복된 모습으로 이 곳을 찾았다. 서울에 직장이 있는 분들이 부럽지 않았다. 사실, 미팅을 한 곳은 창업한 이후 한창 인지도를 올리고 있는 회사다. 온라인으로 나의 전공을 살려서, 무엇보다 '엄마'의 명함도 함께 내밀면서 일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는 정규직이라도 평생직장이란 존재하지 않고, 언제 또 터질지 모르는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악담은 아니지만 올 늦가을에 다시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면, 온라인 세상으로 더 깊이 들어올 수밖에 없다.

'OO 학교 출신입니다.', 'OO동에 직장이 있습니다.'라는 말이 나를 드러낼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점점 출신 학교와 직장의 위치, 사는 곳은 우리의 삶을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지고 있다. 이제는 '제 SNS 계정은 oo고요, 지금은 OO에 글도 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OO 한 일을 하고 싶어서 저를 브랜딩 하는 중이에요.' 이러한 말이 훨씬 더 나의 가치를 높여줄 수 있지 않을까.


2020년 8월의 나는 뚝섬역과는 대중교통으로는 50분, 차로는 막히지 않는 시간엔 30분~40분 거리의 지역에 살면서 프리랜서로 육아를 하고 있다.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는 신랑의 지지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때의 주변 분들의 지지와 격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대에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 서울에 있는 직장을 바라며 내 자존감을 배경으로 높이려고 부단히 애를 썼지만, 30대의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 나의 전문성을 살리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사실, 이러한 삶이 나의 가치를 높여준다는 것을 깨달은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뚝섬역에서 하고 싶은 것은 이제 신랑과의 데이트뿐인 것 같다. 언제쯤 그 시절처럼 '무엇을 먹을까', '어디로 갈까', '무슨 영화를 볼까' 이렇게 '우리가 하고 싶은 것'에만 몰두해서 데이트를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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