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이후, 18개월 이전 아이들에게 읽어주면 좋은 그림책 소개.
#. Intro.
내가 일하고 있는 '언어치료' 분야는 소위 이야기하는 학벌이 상향 평준화되어가는 직종이다. 심리, 상담, 치료 분야가 그런 것 같다. 학부에서 전공을 하지 않더라도 석사 과정을 밟고 나면 자격증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있다. 물론, 그 과정도 정말 쉽지 않지만. 꼭 학문적인 연구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마치 필수 코스처럼 이어지는 석사과정. 그 덕분에 가방끈이 긴 여자가 되었다. '길다' 보다는 '조금 늘어났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요즘은 20대, 그리고 결혼 전에 하고 싶었던 공부 과정을 다 마치고 가정을 꾸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결혼을 하면 언젠가는 임신을 하게 되고, 출산과 육아를 하는 동안은 나의 커리어에 투자를 하는 게 어렵다는 것은, 뉴스만 보더라도 알 수 있으니까.
#1.
육아를 하는 과정이 언어치료사로 일을 하는데 플러스가 되는 부분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저 치료사도 아이를 키워봤으니 나를 어느 정도는 이해하겠구나'.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생각으로 마음 문을 먼저 열어주시는 경우가 많고, 상담 진행 또한 이전보다 훨씬 매끄러워진다.
문제는 나의 내면이었다. 육아를 하는 과정은 계속 내 안에서 '너는 이런 사람이야. 너는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 시간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야. 그리고 또 너는...' 내가 나에게 주는 메시지와 싸우는 시간인 것 같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서 에너지를 얻는 사람이라는 건 결혼 전에도 잘 알고 있었지만 연애하고 친구들 만나는 시간 또한 그만큼 좋아했기 때문에. 결혼 전에는 나를 깊이 돌아볼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도 마음 여유 또한 없었다. 그리고 또 등장하는 직장 이야기. 조직 생활에 대한 낯선 느낌, 서류와의 싸움으로 지쳐있었기 때문에 나의 내면을 돌아보는 건 사치였다. '기질은 언젠가 바뀔 수 있으니까. 나는 어느 환경에서도 잘 적응할 수 있어.'
나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절실히 필요했다. 혼자 책도 읽고 생각도 정리하고 QT도 해야 앞으로의 계획도 세우고 잘못했던 것들을 반성하게 되는데. 온기가 돌 전보다 오히려 점점 커가면서 나의 시간은 점점 온이에게 반납되는 기분이었다. 돌 전에는 하루 3번 정도의 낮잠을 잤던 것 같은데, 돌이 지나면서 하루 2번, 그리고 어린이집에서 하원한 이후는 낮잠 시간은 거의 없었다(28개월인 지금, 주말은 아주 간신히 재워야 1시간의 낮잠을 잔다).
#2.
'일이 육아보다 쉽다'는 말이 직장에 다시 나가게 되면 어느 정도 공감이 가더라도 100% 공감은 아닐 것 같았는데. 출근하러 꾸며 입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엄청난 자유를 얻은 것 같았다. 초록색 신호등 불빛이 깜빡거리고 있어도 혼자 가볍게 뛰어갈 수 있고, 무거운 아기띠도, 유모차도 없이 혼자 사람들 많은 카페도 갈 수 있다. 우아해 보이진 않겠지만 자기만족으로 책을 보고 잠시 커피 한잔도 할 수 있다. 중간에 수업 캔슬이 있는 시간이 주어지면 보고 싶었던 것들도 폰으로 볼 수 있고 오래간만에 연락하고 싶었던 누군가와 연락도 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이 모두 충전 시간이었다. 20대에는 당연시 여겼던 모든 것들이. 아이를 낳고 난 이후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지금 이렇게 출근 전, 글을 쓰는 시간도 어린이집이 아니었더라면. 아이와 한창 집에서 씨름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3.
아이를 낳기 전, 부모상담 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아이와 집에서 놀아주실 때..."였던 것 같다. 당연히 엄마는 집에서 아이와 놀아주는 존재였고, 아빠는 일터에 나가서 돈을 벌어오는 사람. 석사과정을 밟을 때, 나는 아이를 낳고 나서도 일을 하겠노라, 박사 과정도 밟을 수 있겠노라고 생각했었던 나 조차도. 머릿속에 그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In-take(사례 면담지)를 보면 아이의 가정환경을 언뜻 엿볼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맞벌이'라고 적혀있는 경우는 아이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불쌍하다기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특히, 힘 없이 오시는 조부모님 손을 잡고 오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저 아이의 부모님은 얼마나 상황이 어려우시면 일을 가셨을까? 아이보다 일이 더 중요할까?' 이렇게 생각의 흐름이 갔던 것 같다.
얼마나 경솔했던 생각인지. 정작 나는 아이를 낳은 지 100일 만에 구인구직 사이트를 매일 찾아보고 있었고, 어린이집 대기를 이미 출산하자마자 알아보고 있었고(국공립 대기는 지금도 뒷번호다 ㅎㅎ), 다시 분당으로 이사 온 것도 아이를 친정엄마에게 맡기고 일을 하고 싶어서였는데. 20대의 나는 석사 타이틀을 달기 위해 열심히 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세상을 모르고 있었다.
일을 하지 않고 아이와 온전히 하루를 보내고 싶지만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그 상황조차 읽어내는 눈이 없었다.
#4.
출산 후 복귀 초반은 케이스가 많지 않아서 퇴근 시간도 빨랐고 그만큼 온 이와의 시간을 충당해줄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일이 대부분이 그러하듯 케이스는 금방 찼고 일주일 중 하루는 7시에 퇴근했다. 프리랜서의 특성이기도 했다. 출근하는 날, 바짝, 주어진 일을 하고, 출근하지 않는 날은 내 시간 혹은 육아를 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케이스가 차는 만큼 온이의 에너지도 많아졌다. 육아서를 많이 읽어왔고 현장에서 간접적으로 느낀 게 많아서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다짐했지만. 퇴근 이후에 에너지를 온전히 다 쏟아서 아이와 놀아주는 것은 일의 연장선인 것만 같았다. 물론 퇴근 후 육아는 페이도 없다.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다.
#5.
친정엄마도 온이의 에너지를 감당하는데 점점 힘이 드시는 것 같았고, 온이의 개월 수 또한 치료실을 찾아오는 아이들과 얼추 비슷해지고 있었다. 말이 트일수록 아이의 요구는 분명해졌고, '이따가 해줄게'라는 말로 아이를 달래기엔 아이도 너무나 커버렸다. 온이의 개월 수가 딱 그러한 시기이기도 했다. 당장 원하는 것을 상대방이 해주지 않으면 울음과 짜증이 표현이 유일한 수단인 개월 수. 말로 의사전달은 분명히 되지만(특히, 요구사항), 기다리는 것, 상대방의 마음, 이러한 보이지 않는 것들은 읽어내지 못하는 시기인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아이와 퇴근 이후에 잘 놀아줄 수 있을까? 내가 상담할 때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던 '아이와 놀아주는 시간'을 어떻게 해야 잘 보낼 수 있을까. 내 몸이 지치고 일의 특성상 더더욱 일의 연장선 같이 느껴지지만 아이를 위해서라면 견뎌야 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아빠가 아무리 잘 보려고 애를 써도 결국 '엄마'를 찾는다. "온아, 아빠랑 놀아. 엄마는 이거 치워야 돼" "엄마가 놀아줘. 아빠 아니야. 엄마가 놀아줘..."
그리고 이전의 나의 행동들을 반성하기도 했다. 아이를 집에서 만난 순간부터는 아무리 소식이 궁금해도 sns, 카카오톡, 그 외의 연락을 잠시 중단하고 아이에게 집중해야 했는데. 그 부분을 절제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도 분명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6.
1. 퇴근 이후는 아주 긴급한 연락이 아닌 이상은 가급적 스마트폰은 충전기에 꽂아둔다.
2. 아이의 시선에 따라, 아이가 가지고 오는 장난감에 집중한다. 이 시간은 언어치료 시간이 아니다. 절대. 아이의 놀이를 내가 주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3. '저걸 다 언제 치우나' 생각에서 벗어난다. 집이 난장판이 되어도 '아이가 나랑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아이의 요구를 읽어준다.
4. 학습적인 테스트도 잠시 내려놓는다. '지난번에 노란색 알려주었는데. 한번 아나 확인해볼까?' 질문을 한번 하게 되면 질문에 질문에 질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나도 모르게 학습 시간으로 변해버리고, 아이는 다른 장난감을 꺼내온다. 놀이의 확장 기회가 줄어들게 된다.
5. 놀이 중에 스킨십을 한다. 스킨십 관련 그림책을 보면 똑같이 안아주고(예 : 안아줘,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최대한 눈을 많이 맞추어준다. 아이도 몸으로 전하는 언어를 알고 있다. '엄마가 비록 일을 가지만 너를 아주 사랑한다고!'
#7. 다시, 내면 돌보기.
그리고, 결국, 나의 내면을 계속 돌보는 게 중요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지난번 책모임 때도 알게 된 바지만. 온이가 더 어렸을 때는 견딜만했는데 겨우 28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행동이 통제가 되지 않을 때, 소리를 지르게 되고, '저 아이가 나를 약 올리나?' 생각이 드는 것은 분명 나의 안에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그 당시(언제인지 모르는)의 상처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내면이 잘 케어 되지 않는다면, 일을 하더라도, 또 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라나고 있는 온이의 정서와 계속 충돌하게 될 것 같았다. 양육서에서 보았던 '절대 저런 엄마는 되지 않을꺼야'라는 다짐을 불러일으켰던 그 익명의 엄마가 내가 될까 봐 겁이 났다.
#8.
한 아이를 잘 키워내기 위해서는 결코 '엄마' 혼자 해낼 수 없다. 개인주의가 만연해있고, 나 또한 남에게 내 사생활을 오픈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요즘은 더더욱 누군가와 'contact'하는 것이 두려워지는 때이지만. 결국, 한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나기 위해서는 아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좋은 양분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등원 길에 만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이웃집 누군가의 따듯한 미소가 하루 종일 엄마에게 힘이 되는 것처럼.
'아빠의 육아'에 대해서도 정말 할 말이 많지만. 엄마가 일을 잘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기 위해서는(조금이나마 덜 소진되기 위해서는) 남편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부부간에 '나는 몇 시에 하원 시켜서 이때까지 온이를 보았는데. 당신은 적어도 직장에서 혼자 업무 볼 시간은 있지 않았느냐. 나는 혼자 시간이 중요한 사람인데...' 이렇게 물꼬를 트면, 그날 밤은 온이가 보는 엄마 아빠의 모습은 점점 그림책에 등장하는 괴물이 될 것이다.
#9.
그럼, 여기서, 18개월 이전 아이들에게, 일 하고 온 엄마가 보여주면 좋은 책들을 살짝 공개하자면.
<두드려 보아요> 시리즈. '똑똑똑' 의성어/의태어부터 아이들에게 친숙한 사물, 동물 그림이 나온다. 보드북이어서 좋고. 엄마가 아이와 그림책 속 문을 열고 닫으며 재미있는 놀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여기서 아빠가 등장하면 더 좋다. 아빠들은 /똑똑똑/ 소리와 함께 /철커덕/ 문 열리는 소리까지. 훨씬 더 재미있게 읽어주는 것 같다.
말해 무엇하랴! 제목 그대로 엄마가 아이에게 갑자기 하기는 어색한 사랑 표현을 마음껏 할 수 있다.
"엄마가 회사 갔다 왔지만 우리 온이 정말 사랑해!"
약간 학습적으로 분위기가 느껴질 수 있지만. 사과가 /쿵/ 책은 다양한 의성어 의태어가 나와서 돌 이전, 돌 직후 아이들이 너도 나도 좋아한다. 소아과 책꽂이에 비치되어 있는 책.
언젠가 다시 소개하고 싶지만, 최숙희 작가님과 앤서니 브라운의 책은 정말 명작이다. 나는 아이들이 전집도 좋지만 그보다는 이런 책들을 더 많이, 더 일찍 접했으면 좋겠다. 특히 앤서니 브라운의 책은 집을 어린이 미술관이라고 착각하게 만들 만큼 재미있다.
뽀로로를 좋아하는 아이들에게는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이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은 책. 개인적으로는 한 18개월 이후 보여주면 아이들의 인지적인 부분도 은근슬쩍 체크해볼 수 있을 것 같다.(앞서, 학습적으로 놀이시간을 만들지 말라고 했지만...ㅎㅎㅎ)
엄마 퇴근 이후, /까꿍/놀이 책으로 눈 맞춤을 하며 놀아보면 어떨까? 참 신기하다. 까궁 놀이는 4-5살 아이들도 좋아한다.
정말 명작이 아닐까. 이 책은 앞으로도 계속 소개할 것 같다. 아. 전집 업체에서 이 글을 보면 안 좋아하실 것 같은데. 많은 권수의 전집보다는 이렇게 작은 시리즈로 시작해보면 어떨까? 하야시 아키코 작가의 그림체는 한국 정서에도 잘 맞아서 좋은 것 같다. 온이가 하도 물고 빨고 많이 봐서 보드북으로 바꾸어준 책.
신기했던 책이다. 돌 전에도 이 책들을 좋아했던 것 같다. '본다고 해서 뭘 알까?'라고 생각했던 나의 편견에 미안해진 책. 지금은 이 책들의 대사를 거의 외우고 있다. 그림책을 처음 보여주기 시작했을 때의 꿈이 이루어진 건가. 그보다도 아빠와의 애착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다. 아... tmi지만 남편과 싸운 날은 <우리 아빠가 최고야> 책은 읽어주기 싫었다는.
잠 안 자는 아이에게 읽어주기 좋은 책. 신기한 책이다. 달님에게 잘 자라고 이야기하고, 방 안의 사물에게 잘 자라고 이야기했을 뿐인데. 어느새 아이를 안고 있고, 아이와의 대화 분위기가 부드러워진다. 영어책은 작년에 구입했는데. 아직 영어 그림책은 공부를 이제 막 시작한 단계여서. 일 하고 온 엄마가 아이에게 읽어주기에, '일하고 왔는데 아이랑 놀아준 시간도 없는데 자라고 해야 한다니!'라는 죄책감을 덜어줄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10.
그림책을 읽고,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이 많이 변화되어가는 걸 느낀다. 그리고 나의 변화의 과정을 같은 고민을 하는 엄마들에게. 그리고 아이의 말이 늦어서 고민하는 엄마들에게. 나보다 훨씬 먼저 이 길을 걸어가신 선배 엄마분들께. 나누고 싶다.
그리고 상담 현장에서 '아이가 말이 늦은 게 내가 일을 해서 그런 건가'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많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지만, 워킹맘의 80% 이상 분들은.
"혹시 일 하고 계세요? 어린이집은 언제부터 다니기 시작했나요? 하원은 누가 하고 있나요?" 질문에 답을 하나둘씩 하시면서. '그래, 말이 늦은 건 내가 일을 해서야. 나 때문이야.' 감정이 하나둘씩 섞여 나오는 걸 느낄 때가 많다.
28개월 밖에 되지 않은 엄마가 할 이야기는 (감히) 아니지만.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게 해 주자는 다짐으로 일을 해오신 우리의 부모 시대를 거쳐서, '내' 인생을 위해 살아온 '엄마 사람'이. 어떻게 아이가 나오는 순간 모든 걸 잘 해낼 수 있을까.
오늘도, 이런저런 자기 합리화, 깨달음, 또 반성, 또 깨달음을 반복하며, 일과 육아, 죄책감 아닌 죄책감과 앞으로의 계획으로 하루를 채워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