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대학원 수료생이 되기까지의 나의 형성 과정에 대한 기록
30년도 더 지난 과거의 어느 날, 어느 과정에 의해 수정란이 착상했다.
세포분열을 거듭한 끝에 발생한 태아는 탯줄에 의해 영양을 얻어 무난한 태중 성장 후, 적절한 때에 태중을 벗어났다. 그렇게 나라는 생물학적 존재가 첫울음과 함께 호흡을 시작하며, 이 세상에 한 사람으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태어났다고 해서 바로 '나'로서 작용하지는 않는다. 보통 사람은 태어난 지 좀 지나서야 세상의 빛을 보며, 태중에서 형성되지 않았던 근골격계의 발달을 겪고 나서야 자기 몸을 운신시킬 훈련을 할 준비가 된다. 이 과정을 거쳐 땅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가장 기본의 물리 법칙을 체득하는 이 정도 단계가 될 무렵에야 슬슬 몸을 이끌고 도달 거리를 늘려 가며 '나'의 세계를 확충해 간다.
그래서 본격적인 '나'는 이때부터 형성된다. 예전에 누군가 그랬듯 존재는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비롯한다는 것처럼, 주변과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져야 비로소 '나'인 것이다.
나는 유치원도, 초등학교도 여러 군데를 다녔다. 90년대 후반부터 유년시절을 보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유년시절은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시기동안은 절대적으로 나의 환경이 나를 만들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유년 시절은 나의 보호자였던 부모님에 의해 형성됐다.
나의 부모님은 아주 근접한 나이의 베이비부머 세대 사람들이며, 각자 대학 졸업 후 적당한 기간의 사회생활을 거쳐 우연한 인연이 닿아 80년대 후반에 결혼했다.
이듬해에 첫 아이가 생긴 뒤 어머니는 자연스레 고등학교 교사에서 전업 주부로 전환했으며, 이후 몇 년 뒤에는 둘째인 내가 생겼다. 그 몇 년 뒤에는 대기업 직원이던 아버지가 사업가로서 인생에서 또 한 번의 새로운 장을 쓰게 된다.
그렇게 90년대 후반이 되었고, 이 시대의 제일 큰 일인 IMF 사태가 발생했다. 당연히 그 여파는 아버지에게도 찾아갔고, 그 이후의 삶이란, 아마 우리나라 현대 문학의 클리셰 중 하나로 인식될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다. 가산(家産)은 기울고, 두 분은 삶에서 겪어보지 못한 풍파에 올라타셨다. (그리고 이 풍파는 15년가량을 내 부모님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내 유년 시절의 기억은 나누어진다. A 도시에서의 나, B 도시에서의 나, C 도시에서의 나. 그럼에도 나는 운이 좋아서 경제적 비극에 다다른 적은 없었다. 이사는 여러 번 했지만 우리 가족 구성원이 바뀐 적은 없고, 심지어 집의 구조조차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동을 거듭할수록 집의 가치는 조금씩 떨어졌다. 그래서 내 유년의 대부분을 보낸 집들보다 맘에 들지 않는 마지막 정착지에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을 머물게 된 점, 그래서 그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게 된 건 나를 형성해 가는 과정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
유복한 유년기의 기억은 청소년 시기 자아에 큰 괴리를 남겼다. 나보다 먼저 이 나이를 지난 형제의 수순을 내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게, 나이대로 자라 버린 머리가 이전에는 몰랐던 한계를 자꾸만 찾는 게 행복한 점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과 부딪히기도 했고, 청소년기의 뇌가 날뛸 때는 애써 그 발악을 눌러가며 침묵을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