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묘>를 보고
인기리에 상영 중인 영화 <파묘>를 드디어 봤다. 오컬트 영화에 흥미 있는 편은 아니지만 김고은 배우가 무당을 연기한다니, 이 자체만으로 어떻게 기대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결론적으로 나는 이 영화를 정말 잘 봤다. 얼마나 잘 봤냐면, 영화가 마치고 상영관을 나오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맛있게 잘 봤다'였을 정도다. 평소에 흥미를 갖고 있지 않은 주제임에도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흡입력을 가진 영화였다.
영화는 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오컬트적 존재에 의해 과거의 이야기를 들여다보게 된다. 무당 '화림'과 지관 '상덕',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봉길'과 '영근'은 비즈니스상 한 팀이 되어 밑도 끝도 없이 부자인 '지용'의 조부의 묘를 이장하는 임무를 수주받고 이를 수행해 나가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등장인물의 관계나 일부의 이름에서 약간의 역사적 요소를 느꼈다면, 맞다. 이 영화에는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가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지용'의 막대한 부는 그의 조부로부터 기인했으나 '묫자리가 좋지 못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화란을 포함한 네 명의 '비즈니스 팀'은 점차 의뢰인의 가문과 역사의 이면에 접근해 간다. 이들은 영화 초반부터 돈 냄새를 언급하며 표면적으로는 금전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모습이지만, 사실 이들이 맡은 일은 돈만을 생각하면 오히려 못할 만한 일이었다. 영화 흐름의 어느 지점부터 이들은 돈벌이가 아닌 사명감에 의해 맡은 임무에 진심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영근' 역의 유해진 배우는 이와 같은 전환을 맞는 역할에 아주 최적화된 배우라고 늘 생각을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역사적 배경에 의한 클리셰처럼 느껴질 법한 정서를 알면서도 늘 쫀득하게 그 느낌을 잘 살려준다. 영근의 대사에서 우리 시대의 자세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영화는 한순간도 허투루 흐르지 않게끔 시각도, 청각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채워졌다. 귀신 이야기임에 틀림없고, 역사적 사건이 배경에 포함되니 맥락을 이해하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역사와 귀신 영화라고 하기에는 내가 너무 아쉽다. 영화는 오컬트적 요소를 앞세워 이야기를 채워두기는 했지만 그 이면에 '살아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주요 인물들은 죽음과 사후세계를 생업으로 다루는 사람들이다. 그런 만큼 죽음에 대해 덤덤한 태도를 보이는데,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대항한다. 그 누구보다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들이 삶의 영역에 머물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그 급박하고 긴장되는 호흡에서 나는 희한한 편안함을 느꼈다. 오컬트 영화를 보고 느낀 편안함이라니 비정상적으로 느껴지지만 나는 이걸 편안함이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이 편안함에서 바니타스를, 그리고 언젠가 방문했던 스톡홀름의 묘지공원을 떠올렸다.
해골과 일상 정물이 함께 놓인 바니타스화를 볼 때, 처음에는 해골에서 섬뜩함을 느끼지만 계속해서 보다 보면 처연함에서 차분한 감정으로 마치 스펙트럼처럼 서서히 물든다. 그리고 그 차분함이 주는 어떤 평안함이 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해골이지만 누구나 삶을 마감한 지 오래된다면 비슷한 형상이 될 거라는 것, 누구도 비껴가지 않을 죽음이기 때문에 허망해지는 것에서 그 감상을 멈추지 않는다. 그 허망함을 이겨내고 마주하면 결국은 모두에게나 유한한 삶의 가치를 찾게 된다. 그래서 호흡하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 그것이 내가 바니타스에서 전달받는 편안함이다.
바니타스화가 압도적인 공간이 되었을 때라고 여기는 장소가 있다. 이름이 참 어려워서 나는 보통 '스톡홀름 묘지공원'이라고 칭하고는 하지만 '스코그쉬르코고르덴 묘지공원'은 스웨덴 스톡홀름의 시내에서 아래로 주욱 내려가면 나오는 커다란 묘지공원이다. 대체 묘지공원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성립이 가능한가 싶었던 나는 이 공간에 다다르자 알 수 있었다. 그 개념이 공존할 수 있었다는 걸.
광활한 대지에 스미듯 경사진 언덕, 걷다 보면 나오는 연못과 숲인 듯 정원인 듯 조화로운 나무의 배열, 그리고 그 위를 수놓은 거대한 하늘까지. 엄청나게 조화로운 자연이 주는 경외감은 거대했다. 하지만 이곳을 완성하는 것은 웅장함이 아닌 그 웅장함 위를 수놓는 사람들이었다. 시민들은 휴식을 취하러 오기도 했고, 아마 누군가는 먼저 떠난 이를 추억하기 위해 방문한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먼 타국에서 온 이방인은 그들 사이에서 삶과 죽음을 관찰할 수 있었다. 넓은 공간에서 박수와 환호가 들린 것은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통곡이 있는 곳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엷은 미소를 띠었고, 어린아이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아끼지 않았다. 떠난 이들이 머무는 곳에서 누군가를 보낸 사람들이 어린 자식과 함께 와서 추억을 나누고, 먼저 간 친구를 그리워하고, 동시에 오늘의 살아있음을 축복하는 장소였다. 일상생활의 연장에서 늘 죽음을 인지하고 있는 공간. 이것이야말로 바니타스의 공간화일 것이다.
바니타스도, 묘지공원도 삶과 먼 동시에 언제나 그 이면에 함께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파묘>를 바라보고 싶다.
묘지 이장을 하는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 위를 수놓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같은 차원에서 호흡하지는 않지만 같은 공간에 머물던 사람들도 있다. 결국 누군가 살아온 삶, 그리고 그들로부터 이어진 오늘의 삶 이야기이다.
삶은 생명의 기운이 넘치는 낮에 더 잘 느껴질 수 있지만 영화는 낮의 삶이 아닌 밤의 삶을 조명함으로 삶의 빛남을 더욱 강조했다. 죽음으로부터 삶을 지켜내는 과정은 대낮에 이루어지지 않고 사람들의 주의가 꺼진 어두컴컴한 미장센에서 이루어진다. 그 치열함은 스크린 너머의 나를 몰입시키고, 내 삶의 순간을 환기시킨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파묘>는 나에게 다시 삶을 비춰주는 영화이다. 마치 바니타스화처럼, 그리고 묘지공원에서의 시간처럼.
빛의 이면에 어둠이 있기에, 삶의 이면에 죽음이 있기에, 살아있는 순간은 다시금 소중해짐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