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터미션에게

4년 만의 출근을 앞둔 심정

by Mirai

(이 글은 2025년 2월 2일에 쓴 글입니다.)


21년 2월에 퇴사를 하고 25년 2월에 입사를 한다. 지난번 퇴근으로부터 자그마치 4년이 지나서야 새로운 출근을 하는 것이다.


교복을 입고 등교하던 시절에는 학교에 가기 위해 기상했고, 일과 전부를 학교 울타리 안에서 보냈으며, 귀가 후에는 다음날의 등교를 계획했다. 그 외에는 상상할 수 없던 커다란 세계였다. 대학이라고 다른 것은 (교복이 없다는 것만 빼면..) 무엇이 있었으랴. 오히려 학교의 영향력은 그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게 커졌다. 눈에 보이는 울타리로부터도 한참 멀어져서까지 학교는 꼬리표처럼 사람을 따라다녔다. 때로는 학교 근처의 이슈까지도 초면인 사람으로부터의 스몰토크 트리거가 되기도 할 만큼 말이다.

성인이 되고부터는 이렇게 나를 담는 그릇이 나를 대표하는 일이 익숙해졌다. 학교의 이름이, 취업 후에는 회사의 이름이. 내가 들어있는 그릇이 크다는 건 나를 으쓱하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나는 그릇에 기대어 사는 삶에 익숙해지고, 결국은 그릇 안의 안락함에 스스로를 녹여 붙였다.


퇴사는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더 눌어붙지 않으려는 나의 의지였다. 더 이상 그릇에 자아를 의탁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었다. 아니, 솔직히는 그릇이 더 이상 자랑스럽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큰 그릇이 근처에 한 개만 있는 것도 아니고, 더 큰 그릇을 보면 부러워지기도 했다. 내가 자아를 의탁한 그릇이 그다지 자랑스러워지지 않아 지자 어느 순간부터는 금융치료도 불가능해졌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게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온 마음을 울리자 나는 햇수로는 6년을 다는 회사에서 벗어나는 한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항간에는 '회사가 지옥이면 회사 밖은 불지옥' 등의 표현이 떠돈다만, 운이 좋게도 나는 '불지옥러' 신세를 면했다. 가족의 덕을 적극적으로 구하여 주거비나 생활비 지출이 없어 모은 돈을 쏠랑 쏠랑 쓰는 재미로 몇 년을 보낼 수 있었다.

때마침 팬데믹 시절이었다. 해외여행같이 목돈이 들어갈 유혹도 없으니 마음도 편했다. 이전에 바빠서 하지 못한 것들, 예를 들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딴다거나, 빈티지 찻잔들을 꺼내 세팅한 사진들을 찍어 올린다거나 하는 것들을 하며 여유를 한껏 만끽했다.

연초에 퇴사를 하고 늦여름이 되었을 때, 현실적으로 남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날들을 계산해 보았다. 지금 같이만 산다면 2년쯤 되겠다는 단순 계산을 해냈다. 2년. 그렇다면 그다음은? 다시 회사를 다니고 싶은 마음은 딱히 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창업을 할 자신도 없었다. 이 무렵 작은 굿즈 디자인 프로젝트를 시도했었는데 팬데믹이라는 특수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1인 사업을 운영할 역량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이 결정을 미루기 위한 2년을 보내보기로 했다.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과정이 제법 얼레벌레하지만 나의 석사 과정 진학은 너무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은 아닐 수 있으나 순위를 매긴다면 한자리 수 안에 꼽을 수 있을 수준의 선택이랄까. 타고난 지적 허영은 서른이라는 나이에 의해 연륜을 더하여 만족감을 증폭시켰다. 개인적인 지적 자극 충족뿐 아니라 사회생활의 면에서도 이전과 다른 자극을 받았다. 회사생활에서 윗 세대 선배들은 많이 겪었지만 정작 다가올 세대의 인구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에 20대 중반 즈음의 ‘쌤’들은 너무나 흥미로웠다. 교수님께서 앞장서 행복을 추구해 주신 덕분에 연구실 구성원들도 모두 마음이 둥글었다. 그래서 연구실에서의 날들을 떠올리면 잔잔하니 따뜻하다.


대학원 생활이 또 인상 깊은 점은 결혼일 것이다. 나는 6년째 만남을 이어오는 소중한 사람이 있었고, 상대방의 전근과 나의 퇴사로 인해 결혼에 마음은 있지만 실행하기는 어려운 상태였다. 그런데 대학원에 입학하고 나니 지금이 바로 타이밍이다 싶어.. 한 학기 준비하고 학기 끝나자마자 식을 올렸다.

운이 참 좋게도 하늘길이 열리자마자여서 신혼여행도 야무지게 다녀왔다. 남편은 나의 두 번째 학기부터는 특별히 경조사가 없을 테니 연구를 마음껏 하라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나는 그다음 학기부터 연구실에 소속되어 부지런히 연구하고, 졸업 논문까지 무사히 쓰게 되었다.


결혼은 함께하는 여행의 즐거움도 가져다주었다. 신혼여행이었던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나는 남편과 틈만 나면 여행을 즐겼다. 종강하면 도쿄에도 갔고 삿포로에도 갔고, 졸업 확정 뒤에는 영국에도 다녀왔다. (심지어 영국은 지난해에만 두 번을 갔다.)

학기 중에는 남편이 일박 이일씩 국내 여행을 데려가기도 했다. 덕분에 나는 계절이 변하는 것을 자연 속에서 실감할 수 있었고, 야무지게 제철 음식도 챙겨 먹었다.


졸업 무렵엔 때마침 원하는 회사의 원하는 부서에 공개 채용이 떴다. 8월 말에 원서를 썼는데 면접만 네 번을 보다 보니 오퍼 레터는 12월에 받았다. 꽤나 낭만적인 순간일 뻔한 게 스코틀랜드의 기차 안에서 메일을 확인했다.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한 점은 경력 인정 기간이 썩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거였지만. 그래도 어찌어찌 착착 다음 단계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퇴사한 해의 연말 즈음 태어난 조카가 이제 제법 어린이 태가 난다. 나의 영국행의 근원이었던 조카는 이젠 자기가 좋아하는 숫자들과 행성 이름을 우리말과 영어로 말하고, 고모는 공주님이라는 구절을 외운다. 나는 멈춰있다고 생각한 시간 동안 한 생명이 이만큼이나 자란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뒤에서 유튜브를 보며 소파에 누워있는 남편에게는 돌아오는 월요일이 그저 매주 있는 월요일일 것이다. 또 어쩌면 내가 첫 출근에 유난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4년 만의 출근은 마치 영구동토층이 녹아 급작스레 살아난 생명체처럼 낯선 시대를 마주하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기억은 서른에 멈춰있는데, 다가오는 내일은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진급이며 언젠가의 자녀 계획이며 나의 생물학적 나이에 부담되는 것들은 잔뜩 있지만 현실에 적응하느라 그 모든 부담을 잊을 것이다.

너무 잘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안 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진심을 사용하되 나를 위한 중심은 잃지 말자.

일터에서의 나와 일터 밖에서의 나를 구분하며 살아보려 한다.


이제 4년간의 인터미션을 종료하려 한다.

나는 다음 장을 향해 한 발짝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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