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16일 카드리더기가 고장나자 생긴 일.
이 날 아침 카드 리더기에 이상이 생겨 결제가 잘 되지 않았다. 기계 문제라는 것을 인지하고 제대로 공지를 하기 전까지 약간의 혼란이 있었다.
처음 카드결제를 했다가 '망신'을 당한 건 6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은행장'같은 직함이 어울려 보이는 아저씨였다. 타르트를 통째로 주문했고 "오늘 아침회의가 있어서..."같은 말을 했다. 부하 직원들에게 한 턱 쏘려는 모양이었다.
바쁜 아침시간이라, 내가 타르트를 상자에 옮겨 담아 포장하는 사이 주방에서 일하던 '크레이지 일라리아'가 나와서 계산을 한 모양이었다.(가게에는 일라리아가 두 명이었는데 둘을 구별할 때 가끔 농담으로 성미가 화끈하고 열정적인 일라리아를 이렇게 불렀다) 계산대로 돌아오니 타르트를 건네려는데 손님이 사라졌기에 '이따 와서 가져가겠지' 하고 놔두곤 다른 일을 보고 있는데...
아까 그 손님이 빠른 발걸음으로 가게 문을 들어와 상기된 얼굴로 일라리아를 찾았다. "일라리아, 손님이 찾는데." 나는 영문을 모르고 일단 주방에 있는 그를 불렀다. 일라리아가 나오자 손님은 일라리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씹듯이 또박또박. 나는 지금 자네에게 더없이 정중하게 인생의 충고를 해 주고 있네, 라는 식으로.
자네가 내 카드에 돈이 없다고 했는데,
내가 지금 현금인출기에서 바로 이 카드(손에 든 카드를 얼굴 앞에 흔들며)로 돈을 뽑았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마음 상할 수도 있잖나? (It may be hurtful).
나와 라즐로는 순간 상황을 이해하고 손님 마음을 어떻게 달랠까 하는데 자유로운 영혼의 일라리아는 달랐다. 그는 '지금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야'하는 표정으로 손님의 눈을 똑바로 몇 초간 쳐다보다가, 아무 말 없이 주방으로 다시 쑥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곧 안에선 예의 그 오페라 아리아같은 사르데냐 말로 뭐라고 뭐라고 지르는 소리가 홀까지 들려왔다. "아침부터 웬 미친 늙은이가 지랄이야!!!"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나중에 들으니 영어를 잘 못하는 일라리아는 카드결제기가 오류 신호를 띄우자 손님에게 "돈이 부족해서 안된다는데요"(not enough money) 정도로 말했다고 했다.
잇 메이 비 허트풀. 허어어어어트풀. 나는 일라리아의 반응이 몹시 놀라웠지만 그보다 이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 고상한 말투와 표정으로, 이 말은 중요하니 내가 꼭 충고를 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적극성으로, 그가 하려 했던 말은 당신 돈 없단 말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제는 분명 손님들의 카드가 아니라 기계였는데, 화면에 'VOID' 표시가 뜨기만 하면 손님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근데 만에 하나 잔액이 없거나 한도가 초과됐음 어쩌지 하는 표정으로,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하나같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치 이 세계에서 구매력이 없다는 것, 심지어 구매력이 없는 주제에 남의 물건을 집어 가져가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는 것을 다들 얼마나 수치스럽게 느끼는가 하는 걸 실험으로 증명해 보이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아침의 그 손님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경로로든 꽤 상층부에 자리를 하나 꿰어차신 인물 같았다. 그런데 뭐 카드 결제 좀 안 되는 게 그렇게 수치스럽다 생각한 걸까. 어쩌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인격, 능력, 도덕성까지 경제적 능력이 대변한다고 생각을 한 걸까. 이 세상이 그런 세상이란 걸 우리에게 훈계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영어공부책'이라고 불러온 '칼란' 교재에도 이런 명문장이 있었다.(이 교재는 같은 문장을 질문과 답 형식으로 반복해 말하도록 훈련시켜 영어의 문장 구조를 습득하게 만든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람이 보통 더 많이 베푼다고 생각하니?"
"아니. 나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것과 베푸는 일은 따로라고 생각해."
Hurtful. (고상한 영국말로) 허어어어어어트풀. 예, 사장님. 앞으론 함부로 당신의 지불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게요. 돈이 없다고 얘기하는 건 당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돈이 없으면 인격도 없다고 하는 세상, 세상 자체가 상처인데 이 아재는 우리 크레이지 일라리아한테 그렇게 '아침부터 지랄'을 했던 게 아닌가 하는 게 내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