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먹다만사과수집가 Oct 02. 2017

도버해협*을 건너는 페리에서

2013. 12. 27

서로의 인생에 개입할 필요도, 의지도 전혀 없는 다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건 운명공동체로 엮이게 되는 일이 여행에서는 종종 일어난다. 배 저 밑에서 쿠궁-하는 굉음이 들릴 때마다 오늘 나와 운명이 엮인 사람들이 얼굴을 한 번 스윽 둘러보고는 하나씩 뜯어보게 된다.


흔들리는 배 안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메스꺼운 일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배는 좋은 놀이터를 제공하는 것 같다. 변변한 놀이시설 하나 없는 곳에서 아이들은 신비롭게도 자기들의 놀이터를 창조해 낸다. 흩어진 소파들을 혼신의 힘으로 끌어다 모아 퍼즐을 맞추듯 완성한 놀이터에서 덩치가 비슷한 아이들은 말 없이도 그저 서로 좋아 죽는다. 세 아이를 데리고 지친 엄마는 소파 퍼즐 위에서 잠을 청하고, 아이들은 넘치는 에너지를 마음껏 뿜어낸다. 


아이들이 만든 휴게공간에 이제 어른들이 와 앉는다. 어쩌면 기성세대란 이렇게 후세대에 늘 얹혀 가야하는 것... 그 중 일부는 혀를 끌끌 찬다.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 연인의 어깨에 기대어 책을 읽는 사람, 뭔가 심각한 얘기로 미간이 삐푸려진 사람들, 재미진 사람 구경이다. 젖먹이 막내는 기저귀를 차고 큰 엉덩이가 엄마를 닮았다. 언니오빠가 부러워 쫄쫄 달려가다 이내 넘어지고 넘어지고.


엎드려 눈 감으면 물을 타고 배가 떠가는 걸 느낄 수 있다. 흔들리는 비행기에서, 옆자리 소년에게 손이 필요하냐고 묻고 싶었던 기억이 난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손은 두 무릎에 얹고 고개를 푹 떨어뜨려 땅바닥을 보며 후, 후, 숨을 몰아 쉬던 모르는 얼굴에 급작스레 생긴 애착은 운명공유자에 대한 동질감에서 나온 것이겠지. 

마침내 두두둥 소리나며 비행기 발이 땅에 닿았을 때 사람들은 환호성를 지르고 박수치며 기뻐했다. 그래, 새 삶을 얻은 것처럼 기뻐할 수 있는 건 좋은 일이 아닌가.


*도버해협과 칼레해협, 영국해협과 라망슈

한 페친께서 '도버해협'의 표기를 '라망슈(La Manche)'로도 병기해야한다는 지적을 해주셔서 찾아보았다.

구글 지도에서 본 영국해협/라망슈. 위치 표시 된 곳이 도버해협/칼레해협이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바다는 영어로는 잉글리시채널(English Channel:영국해협)이라고 하고 프랑스어로는 라망슈(La Manche : '소매'라는 뜻)라고 부른다. 한국어로는 영불해협으로 쓸 때도 있는데, 에스파냐어, 포르투갈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를 쓰는 지중해 연안 국가들은 프랑스어와 비슷한 명칭으로 부른다고 한다(박동천 전북대 교수). 


도버해협은 이 영불해협에서 폭이 가장 좁은 곳으로, 영국 도버에서 프랑스 칼레를 잇는 바닷길이라고 할 수 있다. 약 35km밖에 되지 않아, 섬나라 영국을 대륙과 이을 때는 이 구간이 자주 이용된다. 프랑스에서는 칼레해협이라고 부른다. 


도버해협에는 해저터널이 뚫리어 있다. 초고속 열차인 유로스타가 터널로 다닌다. 유로스타를 타면 런던에서 파리까지 2시간반이 채 걸리지 않는다.


메가버스

내가 도버해협(칼레해협)을 페리로 건너게 된 건 메가버스 덕분이었다. 2013년 12월 파리에서 런던으로 돌아올 때 나는 이 버스를 탔다. 15파운드도 안 되는 가격으로 섬나라 영국에서 대륙을 왔다갔다 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아 이벤트에 당첨되면 1파운드에 표를 사기도 한다. 


영국에서 출발하는 것을 기준으로 설명하면 여정은 이렇다. 런던에서 출발한 버스가 남부의 항구도시 도버에서 페리에 쏙 들어간다. 1시간30분정도 뱃길을 가는 동안 승객들은 버스에서 내려 작은 면세점과 스낵바 따위가 있는 라운지에 머물다가, 프랑스의 칼레에 도착하면 다시 버스에 타고 육로로 파리까지 간다. 10시간이 넘게 걸리지만, 밤에 타고 아침에 내리면 되니까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여행자에게는 좋은 선택지였다.



 안타깝지만 손님, 파리 가는 버스 이제 우린 운행 안 해요.

내가 탔던 메가버스가 건넌 것이 도버해협이 맞는 지를 찾기 위해 검색을 했더니 이런 화면이 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런던과 파리를 왕복하는 버스 운행을 중단한 것이다. 수지가 맞지 않았던 게 아닐까. 돈을 조금만 더 주면 유로스타를 타고 시간을 세 배 넘게 절약할 수 있으니까. 


찾아보니 메가버스가 파리-런던 노선을 운행한 건 2012년 4월부터다. 꽤나 획기적이었는지 텔레그래프는 기사도 썼다. 표값이 워낙 싸니, 예매는 해놓고 그냥 안 나타나는 사람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내가 탈 때는 버스가 항상 꽉꽉 차곤 했었다. 브뤼셀 갈 때도 이 버스를 타고 무려 16시간을 갔다.

  http://www.telegraph.co.uk/travel/destinations/europe/france/paris/articles/To-Paris-on-the-cheap-a-Megabus-journey-for-just-over-a-pound/


작가의 이전글 미신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