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19
스코틀랜드국립미술관 Scottish National Gallery 앞
맞아도 옷 젖는 줄 모른다는 그 가랑비가 허공에 커튼을 만들면서 일렁거린다
스콧모뉴먼트의 음산한 꼭대기 밑으로 잔디밭엔 아이들이 뛰놀고, 새들은 가로축을 점령하여 가랑비의 투명 커튼과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침잠한 가운데 활기가 넘치는 참 요상한 풍경이다. 페스티벌 기간에 오지 않았다면 적잖이 우울했을지도 모른다.
노랑부리 갈매기
비둘기 대신 갈매기다. 생긴 것은 관상용처럼 깨끗하고 예쁜데 야생이다. 도시의 비둘기처럼 사람 눈치를 보긴 하되 뻔뻔한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당당하게 주인의식을 내뿜는달까. 내려앉고 주둥이를 갖다 대는 데 주저함이 없다. 사람 중에 이 대도시가 자랑할 만 하다고 저 높이 세워 놓은 동상마다 정수리엔 이 새가 앉아 있다. 한참을 내려올 생각을 안 하고 머릿꼭대기에서 도도하게 아래를 내려다 본다.
저 성격으로 사람 먹는 데는 안 달려드나 했더니, 정말 그에 가까운 광경을 목격했다. 엄마와 아기의 피크닉 샌드위치를 포장째 노란 부리에 물고 달아나기 시작한 것. 엄마는 아기를 돌보느라 쫓아갈 사정이 못 됐다. 그 새 갈매기가 자리를 뜨는 모양새를 묘사하기엔 달아난다는 말도 별로 진실과 가깝지 않다. 제 것인 마냥 당당하게, 꽤나 무거우니까 쫑쫑쫑 가서 나무 밑에 내려 놓고 부리를 한 번 쉬고, 그 다음엔 사람 지나는 길을 '횡단'하여 어딘가 안전한 곳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한 용맹한 꼬맹이가 샌드위치를 돌려 받겠다고 새를 쫓아 결국 찾아왔으나, 새는 끝까지 뻔뻔하게 포기하지 않더라. 그나저나 용맹한 꼬맹이는 아기 엄마와 사람들로부터 찬사와 칭찬을 들었고, 아마 한동안 비슷한 일이 있으면 다 나서려고 하겠지?
스코틀랜드국립미술관 앞의 가든은 둥그렇게 패인 모양새로, 시야가 탁 트여 여기에서 새가 날면 헤엄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펄럭, 펄럭, 펄럭, 힘차게 몇 번, 그리고 바람을 타고 슈웅-.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을 내려갈 때나 접영을 할 때 발을 차고 웨이브에 몸을 맡겨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근육은 힘을 쓸 때가 아니라 쉴 때, 큰 호흡으로 숨을 잘 쉴 때 생기는 것과 무언가 이치가 통하는 것 같다.
혼자 다니기
The Ross Fountain 앞의 벤치에 앉아 마켓에서 산 빠에야를 먹어치웠다. 언덕을 내려오면서 변태로 의심되는 사람을 보았기 때문에 위가 긴장했던 것 같기도 한데, 삼분의 일 쯤 먹었을 때 이미 주머니가 팽팽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무들은 충분히 크고, 벤치는 한두 개를 빼고 모두 비어 있었다. 연인들은 모두 자기들 세상에 몰두하고 있다. 캐슬은 안개에 덮여 윤곽만 간신히 보이고 무거운 공기는 바닥까지 내려앉아 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래도 멀리에나마 아이들 소리가 들리는 것이 위안이다. 아이들은 자기와 상관 없는 일에 눈을 돌릴 에너지가 있는 존재이니까. "Daddy! Look at them!" 하고 소리치면 아이 앞에서 용감함을 과시해야만 하는 남자사람이 달려와 줄 것이다.
그나저나, 19세기 사람들은 너무 순진한 것 아닌가?
인류를 구원할 것으로 Science, Art, Poetry, Industry를 꼽다니. 예술과 시 라니. (분수에 적혀 있던 문구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2017. 10. 2.)
특별한 음식
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먹는 즐거움인데, 대체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나는 애초에 론리플래닛이나 미슐랭가이드가 나를 구원해 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그거라도 본다. 꼭 본다. 물론 트립어드바이저가 더 정확하다. 2017. 10. 2.)나이 좀 드신 백인 어른들이 삼삼오오 와인 까고 포크질하는 곳들이 참 좋아는 보였으나, 돈도 돈이거니와 혼자 떡 들어가 밥을 먹기 시작하면 뭐 잘 넘어갈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맥도날드와 KFC, 서브웨이는 그래도 절대 가지 말아야지 다짐 다짐을 했다. 뭘 먹어도 그 보다는 나을거야, 적어도 새로우니까, 하고.
에든버러가 해산물이 싸다는 얕은 정보를 가지고, 어디에 먹을만 한 게 있나 둘러 보았는데 요즘같은 세상에야 어디에서 무엇이 유명한가 그걸 생각할 필요 자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만족감 그 자체 - 'I was lucky!' (와 이건 엄청난데 우리 친구들 중 나만 먹어본 걸 거야)에 가까운 만족감- 인 것 같은데, 일테면 에든버러에서 '스코틀랜드 전통 음식을 먹었다'하는 얘깃거리만 생기면 되는 것이다.
세상 경험이 일천하지만, 매물도에서 먹었던 가정식에서 가까운 음식들 말고 특별히 어디 가서 그 곳 음식이라 좋았던 게 없다. 일본에서 제일 맛있었던 건 마이 친구(미안해 이름이 생각 안난다)네 우동이랑 마이가 고등학생 시절 알바했다는 가게 스테미나라멘(매운라멘)인데, 그건 꼭 그 곳 음식이라 맛있었다기보다는 그냥 맛있는 집에 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일본 중국 그리고 한국을 생각하니까 내가 앞에 세운 가설이 좀 무력해지는 느낌은 든다. 지역에 따라 맛있는 것은 확실히 존재한다는 느낌이 확... 그 지역 음식은 그곳에서 먹어야 한다는 느낌도 확 살아나는데, 그래도 만족감이 자기설득에서 온다는 것 하나만큼은 계속 밀고 싶다.
특히 여행에서 그렇다. 내가 뭔가 특별한 것, 재미난 일, 새로운 경험을 했구나 하는 자기만족을 위해서는 오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설득의 과정이 필요하고, 경험이 곧 소비와 일치하는 오늘날에, 상업은 명민하게 이 자기설득을 도와 주머니를 열게 한다. 뭐 이에 걸려든 사람들이 피해자는 아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여 간만에 자신을 위해 마련한 한 조각의 시간이 불만족스런 기분으로 끝나지를 원치 않기 때문에, 지금의 세상에서 어디에나 다 갖다 붙일 수 있는 말 - '컨설팅' 혹은 '어드바이스'-을 구해서라도 만족감을 갖기를 원한다. 그래서 비즈니스의 손길은 소비자에게 덥석 잡히고, 거래는 성사될 때 의레 있는 약간 긴장감있는 악수와 미소로 마무리된다.
어쨌든 5파운드짜리 빠에야를 배가 터지도록 먹고 해산물에 대한 욕구는 충족한 것으로 한다. 에든버러 어디를 가도 '최고의 해산물'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지금 보니 이 모든 생각은 여우의 신포도로군. 2017. 10. 02.)
날씨
사계절을 다 체험할 수 있다더니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