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2014. 4. 10.
반 년이 넘게 걸렸다. 정확히는 사흘이 걸렸지만, 아이릴을 만나기로 하고 10시40분이면 도착하겠구나 했던 것이 12시15분인 지금에야 기차에 앉아있는 것처럼!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어야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겠다는 판단은 정확했던 것 같다. 다만 이 판단은 운이 좋을 때만 들어맞는 것인데, 이번에도 억세게 운이 좋았다.
세상이 전부 그대로 설국열차로 보이고, 태어난 시점까지의 기억을 다 헤집어 뭐가 잘못됐는지를 생각하던 사흘이었다. 첫날 집에서 이력서를 써 여기저기에 메일을 보내고, 둘째날 처음으로 길을 나서서 이력서를 돌렸고, 가장 염두에 두고 있던 어포스트로피에 먼저 지원하겠다는 마음으로 온라인으로 자리가 있음을 확인했던 하이홀본(High Holborn)으로 갔다. 매장에선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옆에 있던 폴에 한 번 들어나 가 볼까 하여 발을 들였고 거기서 일을 하게 되었다.
얼굴이 하얀 여자아이가 멍-하게 나를 쳐다보는 동안 또 얼굴이 하얀 남자아이가 나와서 '베이컨시(자리)'가 있다며 내 CV를 받아갔다. 연락이 올까 싶었지만, 누군가 친절하게 내 이력서를 받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어 기분이 좀 나아졌었다.
몇 군데 더 이력서를 돌렸던가, 한 개도 안 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내셔널갤러리에 들러서 샴사와 에디가 주는 과일을 먹고, 샌드위치며 샐러드를 받아 왔던 기억만 난다. "Man!" 을 입에 달고 사는 에디와 샴샤는 일을 구한다는 말에, 처음엔 바로 발벗고 나서줄 것 같았지만, 키친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는 내 말에 레스토랑으로 뛰어가려는 샴샤를 잡아 에디는 내가 큰 칼로 야채와 고기를 숭숭 썰어댈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에디는, 그럼 수프 같은 건 만들어 봤냐고 했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 아니 재료를 손질도 못하는데 어떻게?
"주방엔 항상 (재료를) 썰어 놓는 사람이 있었어. 나는 넣기만 하면 됐지..."
했더니 껄껄껄껄 웃어댔다. 어이쿠...
"RA(영국 왕립예술원) 알지? RA.거기 사람 구하고 있어. 내일 아침 일찍 가 봐. 가서 Harry를 찾아. 꼭 가봐."
어이쿠, RA라니...RA라니!(직전해 여름 미술 프로그램으로 견학을 갔던 곳이다)
다음날 아침에, 어디로 가서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몰랐던 나는 RA로 가긴 가 봤다. 내셔널갤러리 카페는 '공기업' 같은 구석이 있어, RA도 그럴지 모르니 장점이 있을지도 싶었다.
마당에 들어가는 건 괜찮았는데, 로비에 가니 리셉션에 한국인처럼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순간 알러지가 돋듯이 악몽이 살아나면서 나는 레스토랑을 찾지도 않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곳에서 커피를 만들다가 (미술 관련 일을 하는) 아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정말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이런 감이 오는 일은 꼭 일어나게 마련이니까.
근처 카페에 이력서 한 개 내고는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구직자만이 알 수 있는 설움같은 건 아마 처음 느껴본 셈이다. 태어나서 처음, 아마도... 이 사회에 나를 받아줄 데가 있을까, 어딜까, 어떤 사람들일까 생각하며 버스 2층에 앉아 있다 보면 내리기가 그렇게 싫고 심지어 무서울 수가 없었다. 어디에 내려야 될까 갈 데가 없는데, 그냥 버스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오면 안 될까 하고, 아부지 퇴직 했을 때 그 심경이 어땠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여기까지 쓰고 Dwell East에 내림)
막막한 마음에 일단 집에 들르자 싶어 들어갔다 침대에 누운채 잠이 들었다. 그래도 정신은 있어서, 혹시 이력서 낸 데 중에 누가 전화할지 모르니 휴대폰을 소리나게 켜두자, 했던 것 같다. 뒤척뒤척, 불편한 반수면 상태에서 회복할 때쯤 전화가 왔다. 질문이 쏟아졌고, 열심히 대답할 말을 찾았다. 그리곤 트라이얼(채용 전 시험 업무)이 잡히자 바로 공원으로 가서 돗자리를 깔고 뒹굴거리며 놀았다.
결국 모든 일은 희망대로 된 셈이다. 여행에 다녀와서 일주일만에 일을 구하자는 목표도 이루었고, 빵과 커피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으며, 드디어 동료들과 동등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다만 수입은 좀 줄게 됐다. 팁이 없는 데다, 시급도 6.35파운드로 짜기 때문이다.
체코어 동화책의 마법은 설명하기 어려운 경험이었다. 'fabulous customer service'를 설명할 수 있는 물건을 가져오란 말에, 어떻게 나는 그 동화책을 가져갈 생각을 했을까, 그보다 또 왜 어떻게 그 책을 살 생각을 했으며 또... 새 일터에서 만난 사람이 그걸 읽을 수가 있었을까! 슬로바키아, 란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츤데레한 매니저 미라의 표정이 이상하게 기쁘고 밝더라 했다.
'그 매장 매니저는 슬로바키아 사람이야. 옛 체코-슬로바키아의 향수를 가진 사람!' 마치 내가 누군가에게서 흘려 듣기라도 한 마냥 그 매장을 찾아갔고, 또 그 매니저가 읽을 수 있는 책을 가져 갔다니. 교회에 다녔다면 이번 일로 믿음이 더 공고해졌을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쇼핑몰 앞에서 기다리다 택시만 와도 '신의 뜻'이라 신비로워 하던 블라디미르를 생각하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