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1일~15일, 런던 하이홀본의 베이커리 카페 PAUL
트라이얼 시프트
사람들이 밝고, 인상이 좋고, 똑똑하고, 영어를 잘 했다.
나는 부지런하게 보이려고 애썼고, 주방에서 시모닉(유쾌한 남자아이였는데 곧 폴을 떠났다)이 권하는 윤기 좔좔 흐르는 돼지수육도 "nervous"하다며 사양했다.
매니저 미라는 애교 없고 시크한 타입이었지만 판단이 명확했고 스마트한 사람 같았다. 주방의 일라리아는 아주 따뜻한 사람 같았다. 카테리나에 이어 또 사르데냐 사람을 만나고 이 사람들 참 화끈하고 털털하구나 하는 인상을 굳히게 되었다.
첫 출근
전날 밤 여덟시부터 취침하겠단 다짐은 하우스메이트 병이 구운 티본스테이크와 함께 꿀꺽 삼켜져 소화되고 말았다. 후다닥 설거지를 하고 침대로 뛰어들었다가 오전 5시 좀 못 되어 일어났다. 전철이 자주 다니지 않는 시간이라 초조한 마음으로 모든 에스컬레이터를 퉁퉁퉁퉁 쉼없이 걸어올랐다. 다행히 꼭 맞게 도착했다.
처음 틸(계산대) 앞에 서니 어찌나 떨리던지, 가뜩이나 돈 계산에 자신 없어하고 실수가 잦아 많이 긴장되었다. 입꼬리는 힘주어 위로 올린 가운데 눈동자는 그냥 난감하고 예민하고 민망해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중적인 표정으로 열심히 서비스에 임했다. 흰 티셔츠에 흰 모자를 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내내 궁금했다.
단골 손님이 많았다. "First day?" 하고 알아보던 손님이 생각난다. 그 손님은 목요일 즈음에 내게 "How was your first week?"하고 물어 보기도 했다.
어쨌거나 나는 자리가 주어지면 그 자리에 굉장히 충실한 사람 같다. 잘하려 애쓰지 말고, 돈 받는 만큼만 하는 걸로, 오늘 당장 일을 못 익혔다고 발 동동 구르지 말고, 쉬는시간엔 샌드위치를 먹으며 책을 읽고, 끝나면 다시 툴툴 털고 나오기로 했다.
틸 앞에서 절절매는 나에게 환멸의 시선을 감추지 못하는 손님도 있었다. 나는 빌브라이슨이었다면 이 장면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생각하며 웃었다. 희화화되는 건 기분나쁜 일이지만, 뭐 그것도 너그럽게 포용할 수 있는 여유가 내게 있으면 좋겠다 싶었다.
"계산대 앞에서 고개를 푹 수그려 미간을 딱 찌푸리고 동전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동양인 여자는 아마 하루 종일이라도 그렇게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10파운드에서 2.75파운드를 빼면 5파운드 지폐 하나, 1파운드 동전 두개, 그리고 25센트를 주면 된다고 몇 번을 말하고 있었지만 '젠틀맨' 답게 입이 열리는 것은 애써 막았다."
해보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선 내가 못하는 이 일을 하는 많은 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된다. 익숙지 않음에서 나오는 팽팽한 긴장감을 당분간 즐기자고 다짐했다.
가게가 조용해질 즈음 매니저 미라는 나를 불러서 준비해온 서류들을 검토하고, 계약조항이 적힌 문서를 건네 줬다. 나는 잠깐 읽어 보다가 'unpaid break'(무급 휴게시간)라는 단어에 약간의 분노를 느꼈다. 시급이 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잇추에서의 경험으로 당연히 유급인 줄 알았던 중간 휴식이 무급이라니. 게다가 3개월 전까지는 '서로 탐색하는 기간'이라는 말도 참 허울이 좋았다. 할인 해 줘 봐야 내가 뭐 빵을 얼마나 먹는다고, 3개월 될 때까지는 30% 할인도 안 해 주고, 3개월 지나서 그래 이제 우리 사람이다 싶으면 그 때부터 해 주겠다는 거다. 흥!
바지, 티셔츠, 앞치마, 모자에 대한 조항도 잇추보다 훨씬 깐깐했는데, 반납되지 않은 품목에 대해서는 마지막 월급에서 일정금액(10파운드씩 정도 되는 거금을)을 차감하겠다는 것이었다. 시작부터 정나미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첫 휴게시간에 고른 연어샌드위치는 별 맛이 없었다_나중엔 좋아하게 되었지만)
2014년 4월 15일 화요일, 둘쨋날
처음으로 커피를 한 번 만들어 보았다. 우유 데우는 일이 어려웠다. 아침엔 점원도 졸리고 손님도 졸리다. 점심시간에 활기가 돌기 시작하면 모두들 힘이 넘치고 표정도 밝지만 아침에 손님들은 생각지 못한 어떤 '기다림'을 만나게 되면 금방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단골손님들의 태도가 참 재밌다. 각자의 바다로 둘러싸인 섬같은 도시 사람들에게 단골가게란 하나의 안정망 역할을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봐 주는 곳, 찾아가면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 곳.
그 마음은 이해하겠지만, 이런 손님은 밉다. 손님이 문에 발 들이는 것을 보자 마자 그의 커피를 만들기 시작하는 라즐로에게 "뭐였지, 내 커피?" 두 손 호주머니에 꽂고 미간 찌푸려 물어 보곤, 원했던 대답(따뜻한 라떼 큰 것, 샷 추가하고 우유는 세미스킴. 같은 것)이 나오자 보란듯이 내게 "재 봐, 잘하지?" 라고 눈빛 사인을 보내는 손님은 참 마뜩찮다. 최저임금을 받고 본인의 커피를 만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늘 여기에 있어 주어야 하고 그래서 자기를 알아봐 주고 늘 같은 커피를 만들어 주었으면 하는 그 마음.
운남성의 소수민족 마을에서 "뭐야, 이제 여기도 전기 다 들어오고 사람들도 다 우리들처럼 살잖아!"하고 실망하던, 세상 사람들 일부는 우리의 체험과 구경을 위해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켜 줘야한다는 몰지각한 바람을 투덜거림에 담아 내뱉던 2008년 여행 때 우리의 모습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