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대신 색으로, 두려움 대신 빛으로

지구를 반으로 접을 수 있다면 3

by 박다예



상파울루 공항의 첫 인상은 무더위 였다. 분명 출발할 때는 흰 눈이 흩날리는 1월의 한 겨울이었건만, 도착한 나를 반긴 것은 뜨거운 햇빛과 귓가에 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낯선 언어였다.


영어라도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귓가에 울리는 언어는 단 한 문장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어였다.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부터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모든 것을 남편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도 답답했다.


내게 상파울의 첫 인상은 아주 거친 도시였다. 오래된 건물에는 그래피티가 가득했고 커다란 벽화가 온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다. 안그래도 겁이 많은 나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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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파울 길거리의 벽화와 그래피티



축구선수인 남편의 구단은 상파울에서도 6시간 버스를 타야 하는 미라솔이었다. 이틀에 걸쳐 브라질에 왔거만 또 6시간 버스를 타야 한다니. 비행기로 갈 수도 있었지만 버스를 택했다. 또 비행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라솔에 다와갈수록, 버스 밖 풍경이 점점 초록으로 바뀌었다. 거칠게만 느껴졌던 브라질의 풍경이 점차 따스하게 나를 안아주었다. 마침내 도착한 미라솔은 태양이 내리쬐는 휴양지 같은 곳이었다. 브라질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 중 뜨랑낄로(tranquilo)라는 말이 있는데, 편안한, 여유로운 이라는 뜻이다. 미라솔은 뜨랑낄로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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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솔 풍경을 담은 그림.


도시의 이름도 태양을 보라는 뜻으로, 인구 6만명 정도의 아주 시골이었다. 평생을 서울에서 살던 나는 처음에는 인구 6만명이 잘 감이 오지 않았다. 한국 사람도 우리 부부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도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올 수 있었던 길이었다. 그런 삶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아마 오지 못했을 것이다.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채로, 세 살 아이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하는데, 거기다 한국인도 없는 도시라니. 그러나 예술가들은 가끔 터무니 없는 용기를 보여준다. 내 용기가 데려다 준 곳은 지구 반대편 작은 시골이었다.


미라솔은 티비에서나 보았던 앵무새와 투칸이 야자수 꼭대기에 앉아 있었고 집 앞에는 망고와 레몬이 열리는 곳이다. 어느날, 굉장히 희안하게 생긴 커다란 못생긴 새가 공사장 위에 걸터앉은 것을 보고 거의 기절할 뻔 한 적이 있다. 알고보니 앙골라 닭이었다.


전갈을 잡아먹는 새로, 동네에 전갈이 나오기 때문에 일부러 이 닭들을 키운다는 것이다. 전갈이 나오는 집에서 산다는 것도 놀라운데 전갈을 잡아먹는 닭이 있다니. 어린시절 읽은 동화책 한 가운데로 들어온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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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칼어로 갈링야 지 앙골라, 직역하면 앙골라 닭이라는 뜻이다. 사진 배경은 집 앞.


나를 둘러싼 낯선 환경들은 아름다우면서도 때때로 서글프게 느껴졌다. 언어를 전혀 하지 못하니 세 살 아이로 돌아간 것만 같았고, 한국에서 보던 아파트와 아파트 앞 감나무, 까치가 그리웠다.


하지만 그 와중에 풍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도 모르게 붓을 들 정도로.


브라질에 올 때 나는 옷이나 화장품, 생필품보다 미술 재료를 먼저 챙겨왔다. 연필, 색연필, 지우개 같은 건성 재료부터 수채화, 과슈, 아크릴 물감까지 삼단 가방 한가득 꾹꾹 눌러 담았다.


그 모습을 보던 엄마는 말씀 하셨다.
“욕심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참, 못 말린다.”
민망하기도 했지만 정말 화가들의 재료 욕심이란 끝이 없기에 못 들은척 포장지에 물감을 담았다.


미라솔에선 여기에선 무엇을 그릴까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풍경이 가장 강렬했으니까. 이곳에 있는 실질적인 무언가를 직접 손으로 담고 싶었다. 잔인할 정도로 내리쬐는 햇빛, 야자수, 그리고 푸른 하늘과 초록들. 손 안에 잡힌 오일 파스텔은 종이 위에서 가볍게 미끄러지며 화면을 미라솔의 빛으로 채워나갔다.


나는 태양빛을 닮은 노랑, 주황, 하늘색을 꺼내 들었다. 미라솔이라는 낯선 땅 위에 내가 남긴 첫 발자국을 그림으로 정했다. 세상에서 가장 밝은 그림을 그리고 말테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우울함도 슬픔도 내 마음을 잠식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낯선 땅에서, 그림으로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언어 대신 색으로, 두려움 대신 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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