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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자리 Mar 01. 2018

MeToo,  2차 피해, 또 다른 전쟁

기록한다.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끝낸다.

    

멈춰야 한다. 알고 있다. 피해자를 위해서 이제는 더 이상 언론의 노출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것을. 오전 내내 침묵을 내게 강요했다. 하지만 지금 한 줄 기록이라도 남겨놓지 않으면 내게는 또 평생 풀지 못한 숙제로 남을 것 같았다. 모든 MeToo가 그렇듯 나 역시 내 숙제를 끝내기 위해 이 글을 남기고 싶었다. 기자들이 기사를 써준다고 했지만 어떻게 보도될지 무엇이 편집될지 알 수가 없다. 혹여 이 글을 보는 기자들이 있다면 기사로 옮기지 말아주길. 상담내용은 없다. 그래도 피해자를 이 글을 핑계로 다시 언론에 노출되게 하고 싶지 않다.

너무나 다양한 2차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하나하나 정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으로 정말 나도 여기가 끝이길 바란다.                                    


 상담심리사 김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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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정의구현사제단의 피해


  이 단체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이 글은 프레임에 빨려 든다. 우리의 폭로에 앞서 연희단거리패가 있었다. 집단이 동원된 성폭력, 성추행. 그 영향이었을까. 한 사람의 범죄가 그 사제단의 범죄가 되었다. 더 나아가 그분들이 함께 했던 모든 절박하고 힘든 이들의 호소도 왜곡되는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건 처음부터 예상했던 피해다. 우리는 그 시작부터 정의구현 사제단과 함께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래서 좋았다 말하는 건 아니다. 우린 정구사와의 소통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아픔도 있었지만 가해자와 그가 속했던 집단이 분리되지 않고 한통속으로 취급받는 것이 적어도 내게는 이 시기를 지나가며 가장 아픈 상처였다. 마치 연좌제가 당연한 것처럼 아무것도 몰랐고 오히려 당신들이 동료였던 가해자의 배신에 절망해야 했던 신부님들이 모두 성추행범인양 매도당했다.

    유명한 악플러들인 그들. 그렇게 자극적인 댓글들은 성희롱 아닌가. 성추행을 비난하면서 성희롱을 하는 댓글을 보고있다니. 마치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인 것처럼 아무런 자각도 없이 성희롱을 해댄다. 그걸 지켜보고 있는 건 피해자에게도 나에게도 슬픔이었다. 이 사회는 정말 너무 무감각하다. 포털댓글에 성희롱을 신고하고 책임을 묻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속상했다.

  신부님들을 두둔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많이 싸웠고 함께 울었으며, 아직도 몇몇 장면에는 솔직히 앙금이 있다. (나빠서가 아니다. 정말 정말 남자들이다. 모른다. 무슨 차원의 말인지를. 그래서 더 끔찍했다.) 하지만 아프고 억눌린 이들에게 손 내밀어 주는 천주교의 의지가 위축될까 마음이 아팠다. 욕을 먹더라도 조롱을 받더라도 예수님처럼 어려운 이들의 곁을 지켜주시길 교회의 쇄신을 위해 힘써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그것이 내가 신부님들께 요청드리고 싶은 참회의 길이다.      



두 번째. 믿어주지 않는 피해자 진술


  우리는 수없이 교회와 대화했지만 무언가 사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많은 피해자들을 만나왔고 해결해나가는 와중에 이렇게 소통이 안된 적이 있었던가. 뭐가 문젠가. 나중에서야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정말 좋은 신부라 철석같이 믿었거나, 아니면 성범죄의 특수성을 대처하는 감각이 무딘거다. 나는 둘 다라 생각한다. 아. 이 신부님이 겉으로 볼 때 정말 선하고 믿음직한 그들의 동료였구나. 그래서 차마 믿을 수가 없었다는 것을. 그분들에게 우선적으로 접해진 가해자의 자술서를 전제로 몇번이고 피해자가 반론해야 했다.

  물어보자. 도둑질을 하고 경찰서에 제 발로 찾아가 내가 몇 시 몇 분에 이 물건과 저 물건을 훔쳤으니 나를 잡아가시오. 그러는 범인이 어디에 있는지. 가해자들의 첫 진술은 모두 거짓이다. 기억나지 않는다. 사랑해서, 챙겨주느라. 격려하고픈 마음에... 다 피해자의 아픔을 후비는 말들이다. 그래서 피해자들이 이것까지는 차마 말하고 싶지 않았던 추가 폭로를 감행해야만 그제사 죄를 인정한다.

  사실은 있는 그대로 사실이어야 했음에도. 안타깝게도 신부님들은 그것이 당연히 사실일꺼라고 가해자의 자술서를 믿었고 그 결과 후에 당신들이 경험한 인간적인 배신감은 더 컸다. 아마 나 또한 그 신부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더라면 피해자의 말을 신뢰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구나. 선하고 숭고하고 성실하고 믿음직스러웠던 외양을 알고 있었던 신부님들이 이 사건과 관련된 사실을 더 알게 되고나서야 망연자실, 허탈함에 탄식하는 것을 보며 느낄 수 있었다. 원칙, 모든 성범죄 사건 이해는 편견을 버리고 피해자의 진술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 번째. 쏟아지는 프레임. 


  세월호의 가족들이 이런 심정이셨을까. 사실이 아닌데 그저 아프다고 살려달라고 했을 뿐인데 수많은 프레임들이 우리에게 검증을 요구했다.

  김어준.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세계로 건너간다. 난독증이 아니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변명은 너무 비겁하다. 내 말을 잘 들어 보라고 그런 뜻이 아니라고. 그게 끝이었다. 반론을 재기하는 사람은 국어를 못하는 사람이다. 물론 당신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겠으나 누군가에게 큐싸인을 주었다. 잘 찾아보라고 혹여 있을 수도 있다고. 의심하라고. 그런 일이 일어날꺼라고. 타인에게 주문장을 넘겼다. 그리고는 발을 뺀다. 내가 당신이 범인이라 말한 적은 없다고. 참 치사하고 촌스럽게.

  그로부터 우리는 있는 그대로 믿고 싶지 않은 이들로부터 현실에서 여러 각도로 의심받기 시작했다. 확대, 확산, 혈안이라는 메세지가 돌았고 방송사의 의도를 의심하는 강론이 이어졌다. 매일 매일, 변명해야 했다. 방송은 확대는커녕 축소 편집되었다. 시간적인 이유기도 하고 피해자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항변하다 항변하다 피해자는 급기야 패닉에 이르렀다. 내가 공격적으로 글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시점이다.

  하긴 처음 우리도 서로를 의심했다. 나는 기레기가 아닌가를 의심했고 저들은 사실이 아닌 건 아닐까를 의심했다. 냉정하게 증거를 맞추고 피해자가 원하면 언제든 방송을 접는다는 다짐을 받고. 실제로 매 방송마다 피해자에게 방송해도 되는지를 묻고 몇날 몇일 밤을 새며 방송을 해주었다. 감사한다. 진심으로. 무엇보다 2차 피해 방송은 내담자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수도 있는 루머를 막아내기 위한 전적으로 피해자를 위한 방송이었다.

  KBS가 방송을 했음에도 이런데 혼자서 Metoo를 했으면 무슨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하기도 어렵다. 방송으로 언플을 한다고 했다. 아이고 주여. 여론전을 하기위해 붙잡고 싶었다면 다른 방송사, 매체도 많았다. 고마워서. 처음으로 믿어주고 피해자의 손을 잡고 울어준게 고마워서. 피해자가 KBS만을 선택했다. 믿지 못하겠지만 우린 할 수 있는 한의 최소한을 한 것이다.  인터뷰룰 하는 그도 방송을 하는 기자들도 이렇게 후폭풍이 거셀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쏟아진 비난을 방송사의 음모라 탓하지 말길. 천주교가 그동안 잘못살아서 매질을 벌어놓은 것이고 이번에 그동안 모아놓은 채찍을 다 풀어 맞은 것 뿐이다. 10년만에 돌아온 돌마고의 우정,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피해자의 친구가 되어주셨다.



네 번째.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온정


  수많은 댓글과 응원이 이어졌다.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다. 이것만은 피해자의 마음을 대신 전한다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허나 그 사이사이 반갑지 않은 마음들이 비수처럼 비집고 들어왔다. 심지어 신실한 기도와 함께. 가해자가 지금 얼마나 비참해하는지 힘겨운지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며,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사과라도 받아달라는 요청. 그것이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을 괴롭혔다.가해자는 죽겠다고 울고 그래서 용서를 받고 그리고 다시 범죄를 저질렀다. 재현된다. 또 죽겠다 한단다. 그러니 빨리 용서를 해줄 수 없냐고. 피해자에겐 또다른 협박이다.

  여기 가족들의 입장을 생각은 해봤을까 싶은 서운함이, 피해자가 가해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공포가 된다는 걸 상상은 했을까 싶은 무심함이 밀려 들었다. 가족들은 너무나 엄청난 비극을 하루아침에 맞이해야만 했고 때로는 가해자를 찾아가 뭐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노에 부들거렸다.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말이 상황에 전혀 도움이 되질 않는다 전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당장 울먹이는 가해자의 모습은 보이고 여기 어디 하소연할 곳 없는 분노에 쌓인 가족들과 무너져버린 피해자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일까.

  알겠다. 가해자는 MeToo 폭로 이후 갑자기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걸. 그러나 피해자는 그 심정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혼자 누가 알아주는 사람 없이 견뎌왔다. 더군다나 가해자의 거짓진술로 인한 루머를 막아가는 상황에서 뚜렷한 징계 절차도 없이 책임하나 지지 않고 용서라니. 다들 너무 바라는 게 많았다.

  피해자들은 살아남았다. 기적처럼. 이 말은 내 말이 아니다. 피해자가 몇 번이고 반복했던 말. 내가 살아있는 것이 기도예요. 겨우겨우 죽지 못해 살아가다 이제야 땅을 밟아보려는 사람에게 자신을 물에 쳐박고 거룩하게 존경받으며 살던 가해자와 인사라도 하라니. 그 잔인함을 인지하지 못하는 온정. 가해자인 당신이 지금 경험하는 것이 피해자의 매 순간이었다. 적어도 당신은 그동안 모든 명예와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며 어쨋든 지금도 같이 안쓰러워해 줄 누군가가 있는 것이다.

  살아진다. 살아라. 당신들 마음 조금 편하자고 피해자에게 또 다시 참고 착한 성인이 되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따뜻한 사람들이 우리를 괴롭혔다.      



다섯 번째. 이제 다시 세상과의 전쟁. 소문


  글로 옮기고 싶지도 않은 너져분한 말들을 굳이 피해자에게 전화 걸어 확인한다. 차라리 고맙다고 해야 하나 항변할 수 있게 해주어서? 피해자가 MeToo를 선택한 이유는 그 무서운 공포의 공간에서 빠져나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MeToo 피해자에게 소문은 그에게 또 다른 검은 방이 될 수도 있다. 지나가는 사람, 뒤로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를 상상하며 모든 이의 시선을 의식하게 하고 두려워하게 한다.  그는 삶을 산다. 마트를 가고 약국을 가고 존경스러울 신앙심. 성당을 간다.

  그를 만나는 우리는 책임이 없는가. 그동안 이런 아픔을 미처 짐작하지 못했고, 피해자가 말할 수 없는 문화를 함께 만들어온 사람들은 우리 아닌가. MeToo 폭로자들은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젠더 운동의 선구자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공포를 벗어나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고 평범한 시민이 되고 싶은 갈망으로 자신과 세상을 부셔버리는 용기를 낸 사람들이다. 그들의 소박한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는 건 우리의 의무다.

  MeToo를 말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이웃이 되어주는 것. 옆집 사람, 동료, 가족이 되어주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짊어져야 할 우리의 참회다.


  그는 가장 험한 길을 스스로 선택했다. 실명 공개. 피해자가 당당한 세상을 위하여.

  난 그가 이 글을 보지 않길 바란다. 이 글을 읽으며 그 하루가 몇일같았던 시간들.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었는지 다시 되새기지 않길 바라지만 만약 그가 이 글을 본다면 그의 심장에 눈을 맞추고 말해주고 싶다.


  꼭 새기길. 이것이 사실이다. 이 모든 혼란은 당신 탓이 아니다. 오히려 당신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로 가는 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매 순간 분노와 절망 불안 그 어딘가에서 벌벌 떨면서도 다시 일어나 준. 그 깊은 신앙과 의지와 용기에 진심으로 무한한 존경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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