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음자리 Nov 22. 2024

미친척하고

용기 3 : 파리가 백마처럼 달리는 방법.

오래 숨죽이고 살펴본 바에 의하면 저놈은 딱 여기까지다. 잘 바바.

얼핏 걸음으로 하면 열 걸음 정도... 저놈에겐 한순간일 테고 나는 달려가야 닿을 수 있는 거리.

마리는 언젠가부터 반복되는 꿈 속에서 거리를 재고 있는 자신을 보았다.

눈앞의 커다란 호랑이의 모습에 질겁하고 얼어붙던, 그래서 식은땀을 흘리며 깨던 마리는

언젠가부터 그 꿈을 곰곰이 되짚고 있었다. 

그놈은 도망치거나 사라질 기세가 아니다.  시선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나를 정확하게 알아차렸는데... 그런데 딱 거기까지.


어쩌면.

아니 분명히 나를 잡아먹으려고 위협하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이불속에서의 마리의 태도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내가 주변에 놓아주었던 돌멩이든 꽃이든 나뭇잎이든... 거절하지 않고 모조리 이불속으로 가지고 들어가더니 그 안에서 숲 속을 다시 그려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는 무서워 떨던 모습에서 마치 전쟁이라도 나서는 것 같은 비장한 골목대장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분명하다. 딱 거기까지였어. 꿈은 딱 열 걸음 전에 끝난다. 나는 얼어붙고 그는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그 장면에서... 그리고 분명히 도망칠 곳은 없다. 여기서 돌아서서 뛰면 분명히 달려올 기세다. 어차피 이렇게 맞서있으나 도망치거나 잡혀있는 건 매한가지다. 유일하게 탈출할 수 있는 방법. 


마리는 태도를 바꾼 듯했다. 그 무서운 꿈에 대해선 마치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침묵하며 소심하게 놀고 숨곤했는데, 언젠가부터 나에게 그 호랑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 생각이 맞지 않냐고 동의를 구하는 것도 같았다. '맞잖아. 잘 바바... 저 호랑이는 나를 잡아먹겠다고 달려드는 호랑이가 아닐지도 몰라. 아주 천천히 걷고 있는데... 숨거나 위협하거나 하지 않아. 그냥 나를 보고 오고 있잖아... 그러니까... 그래서... 어쩌면 나를 잡아먹으려는 게 아닌지도 몰라... 그지.'

혼잣말인 건지, 내게 묻는 건지... 나는 답을 해줄 수도없는 질문을 내게 던지곤 했다. 


방법은 없어. 이렇게 멈춰 서서 돌멩이처럼 굳어버리는 것도... 뒤돌아서서 냅다 뛰는 것도... 저 무서운 호랑이의 시선을 피할 길이 없고... 저놈이 잡겠다고 마음먹으면 잡히는 것도 순간이다.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미친척하고 올라타보는 거다. 

미친척하고 올라타보는 거야. 


등뒤를 물 수는 없지. 그지... 

죽어라 꼭 붙잡고 등에서 절대 떨어지면 안 된다. 그럼 넌 죽은 목숨이야. 

호랑이가 난리를 치더라도 절대 놓지 말고 호랑이 등에 딱 붙어야 한다. 

마리는 심각하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마리는 이불속에 없었다. 

정말 호랑이에게 달려가 등에 올라탄 모양이었다. 분명 꿈일지언정 마리의 각오는 대단했던 것 같았는데 이렇게 죽든, 여기서 놀라서 꽁꽁 얼어버리든, 도망치다 잡혀 먹히든 마찬가지다 싶었던 것 같다. 

되든 안되든... 그리고 호랑이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달렸다. 마치 새끼 호랑이라도 되는 양 호랑이에게 달려가 등에 올라타버린 거다.


그러고 나서 벌어진 일들은... 무서운 광속... 정신없이 호랑이가 달리고 마리는 두 손을 절대 놓지 않았다. 다른 어떤 것도 필요 없다. 떨어지지만 말자. 무조건 버틴다. 방향이 뒤틀리고 사방이 빠르게 지나가고 미친 듯이 날뛰는 속도에도 마리의 목소리는 딱 하나였다. 


무조껀 버틴다. 절때 떨어지지 마. 


언제까지 달려야 하는 건지, 어디로 가는 건지.. 어쩌면 호랑이가 당황한 것도 같았는데 

이런저런 생각할 겨를도 없어 보였다. 그저 꽉 잡고 눈을 뜨고 떨어지지 마. 내가 살길은 이것뿐이야. 

언젠가부터 마리의 눈빛이 호랑이만큼이나 살벌해졌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 건지도 모르게 무서운 속도로 호랑이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리가 호랑이와 난리를 벌이다 사라진 며칠간은 그 무서운 속도와 움직임에 나도 불안해졌다. 

이게 뭔 일인가 싶었고. 가만히 이불속에서 누군가에게 들킬세라 숨어 지내던 마리의 무모한 도전이 당황스러웠다. 하... 호랑이에게 달려들다니...


그러나 며칠이 지나고 어디로 달려간 건진 모르겠으나... 마리 말처럼 진짜 호랑이 등에서 죽기 살기로 버틸 수만 있다면 언젠간 호랑이도 지치겠지 싶기도 하고... 또 왠지 그러다 그 둘 사이에 뭔가 알 수 없는 익숙함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는 내 마음도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파리가 백마의 속도를 경험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했던가...

언젠가 4대 강 반대 오체투지 수행단에 있을 때 전해 들었던 말인데...
파리는 절대 혼자서는 백마처럼 달리지 못하지... 근데 파리가 백마의 꼬리에 앉으면 사정이 달라지지. 그 꼬릴 놓치지만 않는다면 파리도 백마의 속도를 경험할 수 있거든. 그래서 여기 오는 거야... 일상에 찌들어 소심하게 살다가... 세상을 위해 뭐라도 해보자 마음먹은 사람들 곁에... 하늘에 기원하는 정성스러운 사람들 곁에... 나도 백마의 속도를 경험하고 싶어서... 붙잡고 놓치지만 않으면 얼결에 나도 가는거니까. 



마리는 지금 호랑이의 속도를 달려보고 있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전 10화 침묵하는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