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2 - 멈추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창밖은 어두웠고 길에는 퇴근하는 사람들도 북적였다.
나만큼이나 나이 든 여자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아마도 장을 보고 돌아가는 길인 것 같았는데...
갑자기 도로로 뛰어 내려왔고 동시에 달려오던 차가 그녀를 덮쳤다.
그녀가 아스팔트에 쓰려졌고... 이어 머리에서 피가 길가로 흥건히 흘러내린다.
어!! 어!.. 하기도 전에 버스는 출발한다. 저기 사람! 사람이...
분명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누군가 신고를 해야 하는데... 할 것도 없이...
버스는 다음 정거장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꿈이 아니다. 사람이 그렇게 눈앞에서 사고를 당하는 걸 목격한 것이 처음 이어서일까.
나의 피공포증 때문일까. 머리가 하얗게 아득해지고 무서운 생각들이 쏟아져내렸다.
다른 사람들은 못 본 걸까. 서로 조금씩 술렁이다 파도가 잔잔해지듯 조용해진 버스 안.
여자는 아마도 버스를 타려고 무심코 달렸던 것 같은데...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으니..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주변에 사람들이 달려오기 시작했으니... 얼른 응급실로 옮겨졌겠지.
아니야. 죽었을 거야. 그랬을지도 몰라. 사람이 죽었어.
죽음. 검은 밤. 무서운 기운이 파도처럼 덮쳤다.
그녀를 덮쳐버린 것처럼. 마치 내가 그 일을 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손이 떨리고 다시 익숙한 과호흡이 올라왔다. 어쩌지 어쩌지...
나는 상담자에게 SOS를 쳤다.
무서워서 숨이 안 쉬어진다고. 방금 사람이 죽는 걸 봤다고.
상담자는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치지 말고 공포를 견뎌. 너는 절대 죽지 않는다.
죽을 것 같아서 죽는 일은 없어. 무엇이 올라오든 그냥 버티는 거야.
너무 겁이 나면 뭐라도 외워. 주기도문이든, 성모송이든, 불경이든.
하다 못하면 구구단이라도... 계속 중얼거리면서 의식을 붙잡아.
그리고 그것이 몇 분이든, 몇 시간이 되든 버텨라.
너는 너의 공포를 살아내야 한다.
버스 앞자리를 붙잡고, 눈을 감고, 성모송을 중얼거렸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물속에서 손을 휘저어 잡은 동아줄인양.
버스에서 내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두운 길. 멈추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내 방에 들어와 침대 밑에 앉아서도 깊은 물속에 가라앉아 얼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부여잡고 있었다.
밤 2시가 넘었구나. 정신이 들었을 땐.
지금 생각하면 나는 나의 공포를 부러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 이 느낌의 끝을 보자. 죽을 것 같아서 죽는 건 아니라고 했으니.
그랬던 건지도 모른다.
차갑고 깊은 바다에 커다란 빙하 속에 갇힌 것 같았다. 이렇게 얼어붙는구나
얼마나 지났을까...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숨을 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거 봐 숨이 들어가고 나가잖아. 내가 숨을 쉬고 있구나.
숨이 쉬어지는 거구나. 숨이...
소심하게 천천히 숨이 쉬어지는 것을 알아차린 나는
그 호흡을 조심조심 내 온몸에 보내고 있었다.
굳어진 손과 딱딱해진 발에... 그리고 천천히 내 몸이 녹아내리고 있다는 걸,
깊은 바다의 얼음 속에서도 나의 심장은 여전히 뛰어 빛이 나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시 살아나는 나를 지켜보며 밤이 지나갔다.
두려움이 우리를 휘감을 때.
마리는 하얀 호랑이와 눈이 마주쳐 이불속 세상에 숨어버리고
나 역시 코로나로 멈춰버린 세상이 막막했던 어느 날
죽음에 대한 공포와 밤을 지새우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다면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밤이 지나고 새벽아침 문을 열고 마당을 나왔을 때
여느 때처럼 나무에 물을 주고 지나가는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마다 느끼는 풀내음
때때로는 그렇게 훌륭하고 대단하게 살지 않아도 괜찮다고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게 떠오르는 태양처럼 흐르는 바람처럼
여기저기 작은 틈으로 올라오는 작은 풀처럼
형편에 따라 겨우겨우 피어오르는 이름 모를 풀꽃들도
저리 아름다운데...
알고 있었다. 마리를 억지로 깨워 세워서는 소용이 없다는 걸.
내가 코로나 시국을 어쩔 수 없듯이
우리는 그저 잠시 살아있음 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아니 살아있음을 누려보기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그저 그렇게 한순간에 사그라들 수도 있는 거라면
지금 이곳 마당에서 숨 쉬는 이 순간도 괜찮다 충분하다
충분히 아름답다고 말해주기로.
마당에 피어오른 작은 풀꽃들을 모아
마리의 이불 곁에 놓아두었다.
잠시 뭐지? 하며 이불을 들치고 작은 풀꽃들을 바라보던 마리는
풀꽃다발을 손에 쥐고 이불속으로 사라졌다.
마당에 피어오른 꽃내음을 그녀에게도 전해주고 싶었다.
괜찮다. 그렇게 멈추었어도.
그래도 세상이 여전히 아름답게 숨 쉬고 있다는 걸 누릴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