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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자리 Nov 01. 2024

엇갈린 기억

두려움 3 - 어린 시절에 각인된 공포는 사실보다 더 강력한 마법이 된다

사실이 아니야.


어린 시절의 기억은 과장되고 부풀려진다. '

아빠가 마법을 부렸을 리도 없을뿐더러 내겐 그저 북에 있는 둘째 아들의 생사를 궁금해하며 남북한이 뭐라도 같이 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어린아이 같은 눈으로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어찌 보면 불쌍하고 자존심이 강한 노인일 뿐이지만 이런 이야기들로 마리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어린 마리. 엄마는 떠나버렸고 저 무시무시한 검은 마왕에게 들키는 날엔 나에게도 소리를 지르며 다가와 위협할 거라는 두려움. 숨도 쉬지 말고 이불속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전부였다.


정말 말해주고 싶었다. 공포로 눈이 붉게 물든 어린 마리의 눈물에, 벌벌 떨고 있는 두 손을 잡고 '이건 사실이 아니라고, 네가 놀라서 더 무서워하는 것뿐이라고... 아빠가 마왕이 되어 널 잡아먹는 일도 없고... 엄마는 곧 돌아올 거라고... 이 모든 게 니 탓이라니... 그건 더더욱 절대 아니라고...'

해줄 수 있는 말은 많았다. '마리야. 아빠가 엄마에게 못된 사람이긴 했지만 그렇게 무시무시한 괴물은 아니야... 아빠가 너를 예뻐하고 저 큰 현미경도 보여주고 그랬잖아... 기억 안 나?'


공포에 질린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 어떤 이야기도 마리에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 마치 심장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처럼 뛰고 있고, 근육은 굳어질 때로 굳어져 이불속에서 나무토막처럼 얼어가고 있다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신체의 반응들이다.  


 '나는 죽은 사람이다. 절대 들키면 안 돼.'


그 밤에 쩌렁쩌렁 울리던 아빠의 고함소리가 어린 마리의 심장에 꽂힌 것 같았다.


젠장, 추상같은 눈빛의 다 큰 어른이었던 마리에게 저주를 받았던 게 차라리 나았다.

죄책감은 일상을 차분하게 하고 나를 반성하며 근면성실하게 하는 이점이 있었달까.


어린 마리의 공포는 나의 순간순간에 식은땀을 흘리게 했다.

물론 이런 공포를 아기를 사산하고 입양하는 과정에서 처음 느낀 것은 아니다.

심리상담이 진행되면서 상담자와 함께 나는 내 생애 전반에서 느꼈던 극한 두려움들을 모두 골라 세워놓아 보았는데 5살짜리 어린 마리의 공포로부터 시작해,  초등학교 체육시간에 숨을 제대로 못 쉬어 열외가 되던 일들, 중학교 시절 게슈타포(그의 별명이었다) 담임과의 첫 면담 이후에 교실에서 일어났던 과호흡. 이후로부터 지속된 심장부정맥. 그 당시 아기가 열경기를 할 때 내가 느꼈던 패닉들을 모두 줄줄이 연결하다 보니 이 모든 공포의 느낌은 마리가 그 당시 느꼈던 공포와 그 결이 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장 박동수가 130을 넘어가고 숨이 잘 안 쉬어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다 쓰러지게 되는...

마리의 공포는 평상시엔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내가 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덮친다고 느낄 때마다 나를 휘감는 마법처럼 나타나 존재를 부정하는 주문을 외우며 나를 쓰러뜨리고 사라지곤 했다.


 '나는 죽은 사람이다. 차라리 이렇게 사라지면 좋겠다.'


도대체 이 말도 통하지 않는 어린 마리의 공포를 어찌해야 할까.




처음엔 그 공포감을 쳐다보는 것 자체가 숨 막혔다.

그래서 가능하면 모른 척 덮어두고 도망치고 싶었는데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마리의 살려달라는 눈빛을 맞닥뜨리게 되는 날에는 그러기도 힘들었다. 그렇다고 딱히 어찌해 줄 방법도 없는 것 같았다.


처음엔 도망치지 말고 곁에 있어주자가 최선이었다.

이불속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마리의 곁에 앉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아빠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고... 짠한 양반... 엄마에게 무시당할까 봐 저렇게 허세를 부리다니...

이미 돌아가신 후여서일까

마리의 무시무시하다는 검은 마왕.

내게는 그저 자신의 초라한 늙음을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안쓰러움으로만 느껴질 뿐이다.


한참을 그렇게 나무토막이 되어버린 마리와 어수선하게 소리치는 아빠의 방구석에 앉아있다가

조금씩 마리의 이불을 당겼다. 조금씩 더 아빠의 소리로부터 멀어지게... 멀어지게...

뭐라도 해보자 싶은 마음에...


그래, 엄마가 없어 무서워하는 걸 테니 나라도 엄마 노릇을 해줘 봐야겠다 그렇게.

조금씩 마리의 이불을 끌고 나왔다... 처음엔 아주 조금씩... 조금씩 더 과감하게  더 멀리...

아빠의 저 고함 소리가 안 들릴 때까지....

그녀의 이불을 따뜻한 솜이불로 바꾸어주고 예쁜 잠옷을 입히고...

우리가 함께 있는 방을 더 밝은 분홍색으로 만들어주고...

이 방엔 절대 무서운 마왕이 들어와 소란 피우지 못해. 내가 다 막아줄게. 진짜야. 약속해.

마리의 눈을 보며 내가 다 막아줄 거라고. 난 할 수 있다고.


마리는 믿지 못하겠다는 동그랗게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니가 정말 그럴 수 있겠냐는 듯이.

진짜야. 실제로도 아빠는 소리만 크지. 널 때리거나 그러지 않아.

네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검은 마왕을 난 잘 알지. 엄마에게도 별 소용없었던 그 허세...

넌 모르겠지만 난 결코 아빠에게 지지 않아. 날 믿어. 내가 절대 못 오게 할 거야. 당연히 그럴 수 있어.

그러니 날 믿고 자자. 자고 일어나면 내일 아침엔 엄마가 네 곁에 계실꺼야. 진짜야.


다른 말은 전혀 들리지도 믿지도 못하는 것 같았지만... 자고 일어나면 엄마가 네 곁에 계실꺼야 라는 말에는 눈에서 밝은 빛이 스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조금 밝아져서는 아주 조심조심 내게 이리 들어오라고 검은 마왕에게 들키면 안 된다고 나를 이불속으로 끌어들였다.


여기가 제일 안전해. 깜깜하고 숨이 막히지만... 그래도 제일 따뜻해....

마리가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눈물이 맺힌 마리의 등을 토닥여주고 잔잔한 음악을 틀어주었다.

괜찮아. 검은 마왕은 이 방에 없어... 내가 다 물리쳤어...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


마리는 오랫동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동그랗게 쳐다보고 있었지만...

푸근한 새 이불 덕분이었을지... 마리는 상상해보지 못했을 귀여운 잠옷 때문이었을지...

아니면 이불속에서의 작은 토닥임과 속삭임 때문이었을지... 이내 눈을 깜빡이다 슬금슬금 감기곤 했다.


며칠... 아니 그 이후로도 몇 년 동안을...

어린 마리의 불안한 눈빛과 마주칠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이라고.

마치 마리가 넋을 놓고 보았던 신데렐라의 요정이라도 되는 양, 그녀의 방을 변신시켜 주고는 마리가 잠이 들 때까지 이불속에 같이 있어주었다.


잘 자. 마리야.

어린 마리가 이렇게 잠이 들고 나서야 나도 좀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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