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1 - 과거로 들어가는 시간여행
마리가 홀연히 사라졌지만 나는 그의 빈자리를 느낄 사이가 없었다.
무엇보다 아기가 감기에 걸리면 고열이 나고...
그리고 처음 보는 열경기.
눈이 뒤집히고 숨이 넘어가게 울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아기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아 미친 듯이 울며 병원 응급실에 달려가면
아이는 차가운 팩을 겨드랑이에 끼고 그새 지쳐 잠이 들어버리고
나는 지옥을 빠져나온 듯 새파래져 멍하나 하얗게 변해버린 세상을
넋없이 바라보며 앉아있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이러다 잘못되면 어쩌지.
아이를 잃게 했다는 사산의 죄책감은 아기가 조금이라도 아프기만 하면
하얀 공포와 무거운 두려움이 되어 내게 파도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마치 전염병처럼 옮겨지는 것 같았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기의 경기가 있었던 날,
아기 곁에는 들기도 버거웠을 가득 채워진 세숫대야의 찬물, 흩어진 손수건...
어떻게든 아기에게 뭐라도 해주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큰아이의 그렁그렁한 눈물과
놀라 커다래진 눈으로 곁에 앉아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작은 아이의 움츠려든 몸짓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했을 그간의 시간들을 호소하고 있었다.
내 안의 공포와 두려움이 가족들에게도 전해져 아기가 고비를 넘기고 나면
우리 가족 모두가 전쟁터에라도 끌려갔다 온 것처럼 패잔병이 되어 스러지곤 했다.
시계를 봐. 그리고 시간을 세야지. 정신을 잃지 말고 니가 해야할 일을 해.
상담자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아기가 잘못될까 봐 걱정이 되는 거라면 천천히 숨을 쉬면서 시계를 봐.
경기를 하는 시간이 10분이 지나면 신경에 질환이 생길 수도 있어.
그러니 정말 필요한 일을 해야지.
정신 차려! 이렇게 나에게 단호하게 말하고, 숨을 세 번 쉬고 시간을 재는 거야.
너의 두려움에게 할 일을 주는 거야.
그렇게 두려움과 같이 살아.
다행히 상담자의 조언은 효과가 있었다. 아기가 열이 올라 경기가 시작되면
침착하자. 할 수 있어. 예전엔 준비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시간을 재는 거야.
긴장하는 근육에 숨을 불어넣으며 집중. 10초, 20초...
아기의 경기가 가라앉고 몸이 풀어져 내 품에 스펀지처럼 물이 되어 푹 안길 때까지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며 시간을 놓치지 않는 연습.
나는 두려움과 살아야 한다.
그날 밤 꿈. 나에게 마리의 소식이 전해졌다.
스위치백.
거꾸로 후진하는 기차.
도계역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시작점에
흥전역에서 나한정역까지 기차는 거꾸로 후진한다.
용감하게 올라탄 어린 마리의 새벽기차는 스위치백 구간을 가고 있었다.
어린 마리는 기차 창밖을 의자에서 일어서서 쳐다보고 있었는데
밤과 새벽사이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선로 위로 지나가는 풍경이 뒤로 흐른다.
때로 신기한 듯, 때로는 겁나 하면서...
마치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이라도 탄 것처럼.
마리는 홀로 어두운 터널로 가라앉는 기차 속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과거로 두려움으로 어둠의 공포로 들어가는 기차.
마리도 나도 그 컴컴한 터널에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