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2 - 어린 시절에 만들어지는 두려움이라는 마약.
마리의 새벽기차는 어두운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호기롭게 기차를 타보긴 했으나 그 이후를 생각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 두려움의 동굴로 빨려가는 그녀가 어디에 도착하게 될지 알고 있었다.
마왕의 동굴.
마리는 그를 속으로 그렇게 부르곤 했다. 검은 마왕이라고.
그의 목소리는 천둥 같아서 주위 모든 사람들을 움츠려 들게 만들었다. 간호사든 환자든 가족이든 할 것 없이 그의 목소리를 가로막을 자는 없었다. 그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는 마치 마법사의 것처럼 단단해 보여서 저걸 휘두르게 되면 필시 누구 하나는 더러운 병에 걸리는 저주로 죽게 되는 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어린 마리에게 그가 그렇게 무섭고 절대적인 존재였다.
실제로 그는 마왕이라 불러 손색없을 만큼이나 화려했다.
1902년 이북에서 태어나 함석헌선생님 밑에서 오산학교를 다녔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거쳐 일본에서 법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던 수재. 6.25 때 큰아들과 김구선생님을 따라 월남한, 마치 역사책에서 툭 튀어나온 듯 낯설기만 했던 그가 태백산 첩첩산중인 도계에서 지팡이를 짚고 다리를 절며 숨어 지내는 지경이라니.
숲 속 깊은 그 동굴 안에서 그는 분명 대마왕이었다.
공립병원이 문을 닫는 날이면 도계시에서 아파서 기댈 수 있는 병원은 오로지 그의 병원뿐이었으니, 그의 말은 절대적이고 거침이 없었다. 60이 넘은 그에게 손녀뻘도 될 수 있었던 26살의 배운 것 없고 가족도 변변치 못한 젊은 여자는 너무나 다루기 쉬운 먹잇감이 된 것 같았다.
유일한 이남의 피붙이였던 큰아들을 잃고 생사를 알 수 없는 이북의 작은 아들대신 유일하게 대를 이를 아들을 낳아준 것만으로도 그가 방랑 생활을 접고 작은 시골병원에 안주할 충분한 이유가 되어주었다. 병원 운영을 위해 그가 따로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젊은 여자는 성적대상일 뿐만 아니라 사무원이자 파출부였고 돈 안 드는 엑스레이 기사며 간호사를 휴가 보내고 나면 임시 간호사로서도 제법 쓸만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그에게 쌓인 모든 스트레스는 독한 의처증으로 그녀에게 고스란히 퍼부어지곤 했다. 모진 매질과 험하기 짝이 없을 모든 음담패설의 욕들이 그녀의 몫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마리가 학기 내내 서울에 있는 큰엄마에게 보내어진 건 엄마와의 생이별의 아픔이기보다 마왕으로부터 탈출하는 해방구였는지도 모른다. 마리는 매 학기 도계를 떠나면서 한 번도 슬퍼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도계역으로 회귀하는 듯 스위치백 하는 새벽기차가 그녀를 당황하게 했으리라.
마왕의 제국에서 마리는 아마도 허접한 이불을 방패 삼아 몸을 숨기고 자신만의 동굴에 피신해 있을 터였다. 엄마가 모진 매와 도둑년에 화냥년이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은 집을 나가버린 밤. 죽은 듯 자는 척을 하며 이불속에 숨어 쩌렁쩌렁 울리는 마왕의 목소리에 질겁하며 엄마는 왜 나를 두고 혼자만 가버린 건지... 엄마가 오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집어삼키던 그 밤이 어린 마리의 두려움의 종착역일 테다.
엄마가 도망치기를 바라는 한편, 돌아와 자신을 구해주기를 바라는 모순에 빠져버린 기원. 언제나처럼 엄마는 다시 돌아왔고 늘 바쁘고 아팠던 엄마가 마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는 거의 엄마의 비극적인 하소연이 그녀의 무릎 위에 바위처럼 내려앉았다.
정신없이 맞아서 고막이 터졌던 이야기, 힘들어 폐병에 걸렸어도 약하나를 주지 않아서 옆집 약국에서 불쌍해하며 약을 지어주더라는 이야기, 내 아이를 자신의 호적에도 올리지 못했다는 이야기... 듣는 것만으로도 매질을 당하는 것처럼 아프고 버거웠던 어린 마리는 늘 묻곤 했다. "왜 엄마는 도망치지 않는 거냐고..."
그럴 때마다 돌아오는 대답. '니가 태어났으니까... 니가 없었다면 도망쳤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마리는 끝을 알 수 없는 공포의 근원을 찾았다.
이 모든 비극은 내가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어린아이에게 유일하게 납득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해답.
이후 자신에게 닥쳐오는 모든 비극을 해석하는 습관이 된 듯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너로 인해 시작된 비극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꿈속에서 쩌렁쩌렁 울리던 고압적인 마왕의 목소리는
내가 처음 만났던 마리의 차갑고 매서웠던 목소리와 너무나 닮았다.
두려워하면서 닮아가는 거였나...
어린 마리의 그렁그렁한 눈빛은
나를 제발 이곳에서 구해달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