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 1 - 꿈은 마음을 투영한다.
검은 밤. 깊은 숲 속. 8살 된 마리는 숲 속 바위 뒤에 숨어 있었다.
쓱... 지나가는 소리. 조용하지만 머리칼이 쭈뼛서는 느낌. 한기.
두리번거려도 소리의 정체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바스락... 아무리 조심스레 움직여도 낙엽이 미끄러지며 내는 소리는 천지에 울리는 것 같고
그때서야 마리는 내 곁을 지나가던 소리의 주인을 만나게 된다.
너무나 선명한 백호. 아무런 거리낌 없이 천천히 마리의 주변을 걷고 있는.
어쩌지? 어떻게 하면 좋지?
머릿속은 하얘지고 손과 발은 얼어붙어 움직여지지 않는 그때.
커다랗고 하얀 그 호랑이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천천히 마리에게로 다가온다.
눈빛으로 제압된 마리는 움직일 생각을 못하고 한 번에 덮치면 끝장날 거리까지.
조용히 심장이 멎을 것처럼.
헉.
마리가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 온몸에 긴장이 가득하다.
마리가 잠들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가끔씩 자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 몸부림을 치곤 했다.
소리를 지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숨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고 그리고는 다시 온몸을 떨었다.
마왕의 목소리를 벗어났으나... 그래서 마리가 공포심에서 온전히 벗어난 건 아니었나 보다.
그녀는 반복되는 호랑이 꿈을 꾸었다. 공포는 이제 마리의 마음속에서 다시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마리의 꿈이 내겐 마치 동화책의 한 장면같이 느껴졌는데 마리에겐 전혀 그렇지 않았다. 식은땀을 흘리고 꿈을 보여주었을지언정 그 꿈에 대해 다시 생각하거나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아 했다. 그저 주변을 살피고 사방이 안전한 지를 돌아보고는 이불속으로 들어가 가만히 죽은 척 숨어있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좋아할 법한 인형이든 장난감이든 우스갯소리라도 건네보려 했지만 그 어떤 것도 효과는 없었다.
어린 마리의 감정은 내게 오롯이 전달되곤 했기 때문일까. 그즈음엔 나도 그런 악몽을 경험하곤 했다.
주로 아이들과 관련된 꿈이었는데 시장에서 아이들을 잃어버려 찾아다니면서 지쳐 울거나, 사막의 모래구덩이에 빠져들어가는 아이를 구해내지 못해 동동거리면서 살려달라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거나, 차를 타고 가다가 내 잘못으로 사람이 죽게 되는 등의 사고를 당하는 꿈이었다.
어찌나 생생하던지... 그런 꿈을 꾸고 나면 아이들 방을 찾아다니면서 벌컥 문을 열고 모두 멀쩡한지를 확인하고 꿈이었음을 체감하고 나서야 온몸에 기운이 빠져 주저앉곤 했다.
나는 어쩌다가 꾸는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이들은 그때마다 '또 우릴 잃어버렸나 보네... 우리 다 멀쩡한디...ㅎ' 이렇게 별일 아닌척하며 위로해주기도 했다. 아마 몇 번은 아이들 앞에서도 너희들을 잃어버리는 꿈을 꾸었다고 정신없이 하소연을 하며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울고 그랬던 모양이다. 마치 엄마가 내게 그랬듯이. 나도 아이들에게 내 불안을 그렇게 덮어 씌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리가 공포에 떨면서 숨죽여 있는 것보다 따뜻하게 잠을 자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마리는 그 이상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도 전에 내가 슬쩍 기차를 타보라고 꼬드겨 덥석 올라탄 기차여행을 후회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괜히 저 여자 말을 듣고 기차를 타서 이 꼴이 됐잖아'라고... 가끔은 나를 원망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모... 애초에 기차역에서 큰엄마의 등에 업혀 모습이나 지금 이불 속에 들어가 숨어버린 모습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나는 나대로 할 말이 있었다.
마리에게 기차여행을 권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 어차피 마리가 부딪쳐 살아내야 할 삶의 한 순간이다.
그러나 그 덕분에 나의 어떤 말도 이미 마리에겐 신뢰를 잃은 것 같았다. 그녀는 그저 내가 만들어준 안전한 방, 따뜻한 이불속에서 오직 자신의 무사함을 확인하며 굴을 파고 누워있었고, 그나마 이젠 두려움에 떨지 않고 이불속에서 인형놀이를 하거나 노래를 듣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의 놀이를 하며 만족하고 있다는 게 다행인 정도였다.
어쩌면 때마침 찾아온 코로나 시국이 마리가 자신의 이불속 세상을 더 안전하게 느끼게 했는지도 모른다.
와... 코로나라니... 세상이 예고도 없이 뒤집어지는 일이 가능하다니.
모든 당연한 것들은 위험한 것이 되고 일상의 소소한 경험들이 위협이 되다니.
학교는 문을 닫았고, 집단상담도 불가능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불가능해져 버렸다.
나의 상담실도 텅 빈 공간이 되어 마치 마리의 이불속 세상같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안전한 곳이 아무 데도 없는 것 같은 그 시기에 마리는 '거봐. 이불속이 제일 안전하지'라고 나를 가르치는 것 같았다.
답답하지 않아? 밖에도 놀게 많은데...
마리에겐 어림없는 소리. 이불속이 가장 안전해.
호랑이도 마왕도 코로나도 온통 세상은 무섭고 두려운 것들 뿐이야.
마리를 이불속에서 끄집어낼 방법이 없다. 코로나로 멈춰버린 세상을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각자의 갇힌 세상을 굳건히 지켜나가면서 서로의 안부를 가끔씩 확인하곤 했다.
언젠가는 스스로 마리가 이불속은 너무 갑갑하다며 스스로 일어나 주기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