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 속에서의 즐거움

AI가 줄 수 없는 몰입과 성장의 성취감

by 마음자리
여름 여행을 가자고 가족회의를 했다.
집에서 그냥 쉬고 싶다는 첫째와 런닝맨에서 본 홍콩에 가자는 둘째.
그 곁을 뱅글뱅글 돌던 막내가 드디어 한마디를 했다.

'바다는 어떻게 생겼어?'

한 달 전 코타키나발루에 다녀온 첫째와 둘째는 바다를 보고 싶어 하는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합의했다. 나는 우리가 책정한 비용으론 비행기를 탈 수 없다고 했고, 하루 종일 운전하고 싶지 않다고도 말했다. 그 당시 세월호참사가 있었기에 배로 가는 것도 가장 짧은 거리로, 장흥항에서 가는 2시간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아이들은 버스와 기차 대중교통을 두루두루 이용하는 코스를 계획해야 했다.

순천의 정원박람회를 거쳐 장흥의 물축제를 지나 2시간의 배를 타기로
3일을 머물면서 이틀은 아이들이 짠 여행코스로,
마지막 하루는 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을 한두 곳 방문하고 돌아오는 것으로
짐은 각자 싸고 선물을 살 수 있는 경비는 1인당 5만 원 이내.
그래서 그 여행은 어떠했을까.

순천의 정원 박람회는 너무 더워 땡볕이었고
장흥의 물축제는 장마로 모두 잠겨버렸다.
장흥항에 가는 길에서는 마을버스가 고장 나 멈추기도 했고
(나는 기사아저씨가 버스아래의 배기구를 뜯어 올라오시는 걸 난생처음 봤다)
제주에서는 아이들이 선택한 희한한 박물관들을 수없이 돌아다녔다.

아이들은 돌아오는 버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이런 생고생하는 여행은 다시 한번 재고를 해야 한다고 했고
돌아온 후 페인트통을 뚫어 가족 저금통을 만들었다.
우리가 직접 매달 비행기 표값을 모으겠다는 거였다.
그 결연한 눈빛이라니.


아이들이 어렸을 때 가족회의를 하며 진행했던 가족여행

헛웃음이 나는 그 한순간 한순간은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다.

내겐 매 순간이 예상밖의 모험이었다.


태풍을 뚫고 세월호의 팽목항을 찾아가던 스릴 가득한 여행이나

겨울 스파여행을 하자고 결정한 날, 하필 영하 17도라

수천 평의 온천스파에 달랑 우리 가족 5명이 수십 명의 안전요원의 경호를 받았던 일이나.


지금 생각하면 다 어딘가 나사 빠진 계획 같았지만

함께 선택해서 결행하는 과정상의 실패는 모두

두 번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결과보다 과정이 주는 즐거움



AI시대의 특징은 과정이 없는 결과를 가능하게 한다.

굳이 내가 수많은 책을 도서관에서 뒤지지 않아도

선배나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문제집을 들고 풀어달라 애원하지 않아도

수시간만에 그럴듯하게 넉살 좋은 결과를 풀어낼 수 있다.


일의 능률을 빨라지고 몇 날 며칠을 말 안 듣는 팀원과 끙끙대며 만들던

프레젠테이션도 AI와 시원하게 1시간 내에 끝낼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여 과정이 사라지고 결과만 남게 되는 시절이 오고 있다.


하지만 AI를 써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AI가 없는 참고문헌과 이론을 만들어 내며 그럴듯한 사기를 칠때도 있다는 것을.

개인의 독특한 사유의 과정을 걸치지 않은

그럴듯하지만 표면적인 결과가 난무하게 되면 될수록

깊은 사유, 진정한 관계, 온전한 만남은 더 그립고 간절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했던 어이없는 시간들을 추억한다.

세상이 각박하면 각박할수록

그게 무슨 진리라고 개똥철학을 하며 토론으로 밤을 새우고

그래도 굳은 의리라고 같이 혼나고

세상 둘도 없을 우정이라고 비를 맞고 시를 외우며

로미오 줄리엣 마냥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며

안타까운 편지를 쓰던 그 연약함을 기억한다.


세상은 이렇게 어리석고 어설프고

그래서 더 간절하고 진실했던 과정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하지만 이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그 깊이를 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너무나 비효율적인

엉뚱하고 황당해서 잊히지 않을

그래서 그 사람이 더 그리울 시간들

그 불완전함이 더 진실했던 추억을 자녀에게

허락하고 계신지.


똑똑하고 편리하고 효율적인 세상은 안타깝게도

모 아니면 도,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흑백논리를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세상이 딱 그렇지많은 않다는 거.

너를 배신하고 돌아선 그 조차도

한때는 너에게 진심이었다는 거.

그리고 그 순간을 그도 나도 그리워할 수 있다는

이 효율성으로는 정리되지 않는 삶을 AI가 대신할 수 있을까.


결과보다 과정에 진심을 다하는 사람.

그래서 실패든 성공이든 상관없이

그와 함께 있어 즐겁고 행복해지는 사람.


행복은 결과이기보다 과정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