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래의 가족 이야기_엄마라 쓰고 봄꽃이라 읽으련다
허리 수술 후, 엄마가 가장 먼저 배정받은 병실은 8인실이었다. 그 병실은 포괄 병동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포괄 병동은 가족이 상주하지 않아도 병원 내에서 환자가 간호서비스를 전부 받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물론 일반 병원 병실보다 약간의 가격 차이가 웃돌긴 하지만, 그렇게 부담되는 가격이 아니었다. 가족이 상주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우선 큰 매력으로 다가왔고, 요양사 선생님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만족스러웠다.
포괄 병동의 병실이 비지 않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척추, 관절 수술을 대기하고 회복을 하고 있었다. 병원에서는 수술이 끝나면 하룻밤을 거쳐 가는 대기 병실이라는 곳에 엄마의 자리를 한자리 마련해 주었다. 수술을 하루 앞둔 환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의 괴성과 아픔을 스캔하듯 자신의 머릿속에 사람들의 모습을 각인시키고 있었다.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무연히 힘이 날아간 엄마의 몸을 사랑스럽고 달콤한 말로 위로해 주지 못했다.
반나절을 훨씬 넘긴 시간에도 병실로 돌아오지 않는 그 수술시간의 기다림은 소슬한 기운까지 들게 했다.
수술 후 이틀 정도가 지나서야 엄마는 기운이 드는 것 같았다. 아픔을 자연스럽게 아픔으로 받아들일 줄 알고, 몸 어딘가에 힘이 생겨 움직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신기해하는 듯했다. 8인 병실 안에 어떤 수술 환자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 ‘저 아지매 이제 살아났는가베.’라고 하는 것을 보니 말이 많아지고 있음을 우회하는 농후 깔린 말이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너무나도 활짝 열려있는 공간이 신경이 쓰이는 대목이다. 엄마는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유쾌한 대화법을 가진 사람이다. 목소리가 큰 엄마의 지방 사투리는 간혹 조용함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배려 없는 행동이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재빨리 인원수가 절반에 해당되는 4인실을 부탁했다. 대기하며 하루를 더 기다려야 했다. 4명 정도면 번잡스럽지 않을 만큼의 수다를 떨며 지낼 수 있겠다는 나의 판단이었다. 엄마는 돈만 비싼 곳으로 왜 옮기느냐고 약간의 불만이었지만, 사람들이 많아서 떠들기 좋았던 그 분위기를 마음에 들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허리 수술을 하면 보통 2주의 시간을 두고 퇴원이 결정되는데, 소소한 일상의 간호나 식사, 배변 활동, 걷기 운동, 이 모든 것들을 도맡아 해주는 간호 선생님들, 조무사 선생님들 덕에 날라리 보호자인 나는 편안히 엄마의 허리 회복을 지켜볼 수 있었다. 특히, 4인실에 들어와 미리 병실을 지키고 있었던 환자분들의 관심과 사랑 덕에 엄마는 여전히 많은 이야기를 하고 소통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우리 형제자매 이야기는 벌써 병실 사람들에게 전달이 되었고, 엄마는 고향 소식을 알리는 기자 역할까지 하는 듯했다.
고향의 소소한 텃밭이야기에서 바다이야기까지 엄마의 입담은 무궁무진한 자료 기록처가 되고 있었다. 초겨울이 다가오면 유자청을 만들러 다니는 이야기, 겨울의 또 다른 극한 노동이었던 미역공장 이야기는 이 병실의 아주머니들에게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하루는 병실을 찾은 내게 고향 이야기를 들었다며 질문을 쏟아내던 한 아주머니의 밝은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엄마가 참 건강하셔. 허리가 많이 아플 건데도, 벌떡 벌떡 혼자 일어나시는 것 보면, 미역 많이 드시고, 공기도 맑은 곳에 사셔서인지 건강하신 것 같아. 내가 그 섬에 산에도 오른 적 있어. 공기가 참 좋더라고”
아무래도 엄마는 고향 이야기로 소통의 중심을 이루었나 보다. 심지어 병원의 아주머니들은 엄마의 어려운 사투리도 재미있어해주시고, 엄마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셨던지 며칠 만에 한층 밝아진 모습으로 밥맛이 돈다고도 하였다. 사투리 알아들으시겠어요?라고 묻는 나의 말에,
“응, 대충, 그렇구나 하면서 알아들어. 참 그 말이 그거 아니야? 저번에는 뱀을 배아암이라고 하더라고. 그거 뱀 맞지?” 나는 한참을 웃었다.
환자를 위한 마음은 의사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선생님 엄마 말을 이해하기 쉽지 않으시겠지만 잘 부탁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얼마 전에 완도에서 할머니 한 분이 제게 치료를 받으셔서, 사투리에 적응이 됐습니다.” 라며 웃어주시는 그 주치의는 정말 엄마에게 맞춤 의사가 아니었었나 싶다.
병실의 아주머니들과 친해지는 엄마를 보면서 딸인 나 역시 느낀 바가 많았다. 많은 이야기를 들어주고 엄마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엄마가 웃는 일이었음을. 왜 일만 하며 몸을 가만두지 않느냐는 자식들의 뭇매 같은 언어를 엄마는 이해를 못했을 터였다. 로봇이 되어 걸을 수 있는 힘이 없었던 지난날도 엄마는 일을 계속했었다. 힘든 일, 그 일이 일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엄마는 사람들과 만나며 소통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병실의 누군가는 먼저 퇴원을 했고, 병실의 누군가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올 무렵에 엄마는 우리 집으로 퇴원을 했다. 추운 겨울 시골생활을 바라지 않았던 형제들의 바람이었다. 병실의 그들과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맴도는지 간혹 그들의 이야기를 한 보따리 풀어낼 때가 많았다.
엄마는 그녀들과의 추억이 가득한 한겨울의 병실생활을 로맨스처럼 떠올리는 듯했다. 언젠가 퇴원 후에 옆 침대, 앞 침대, 두 명이 핸드폰을 보더니 시골 번호를 적어 가더라는 엄마의 말을 들었다. 핸드폰 번호를 찾지 못해 시골집 전화번호를 적어가더라는. 설마 전화까지 할 사이가 되었나? 의 궁금증이 먼저였고. 관계의 민감성에 마음을 넓게 열지 않는 나의 방식대로 해석했기에 ‘병원에서 그 시간이 끝이지.’ 나는 내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판단했다.
어느 날, 시골로 돌아간 엄마가 웃음을 입가에 가득 머금고 내게 전화를 넣었다.
“야 야, 미래야. 병실 그 아지매한테 전화가 다 왔다. 날마다 맛난 것 챙겨준 그 아지매. 내가 너네 집에 있는 동안에서 시골로 전화를 했다고 하드라. 어째 잊지 않고 전화를 다 했을까 싶다. 한참을 이런저런 얘기를 했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들만의 관계 형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에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정말 인사말로 ‘전화하겠다.’라는 말은 그냥 인사말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미래야, 그 있잖냐. 다음 달에 병원에 올라갈 때, 그 아지매 식당 좀 들리자. 너 그 가게 안다고 했제. 내가 미역 좀 사서 꼭 전달해 주고 싶다. 알았제.”
명함을 받아둔 그 아주머니의 식당을 들먹이는 엄마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기쁨이 교차하고 있었다. 엄마의 봄은 이렇게 반가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서 시작이려나. 그 아주머니를 만나면 엄마의 핸드폰 번호를 다시 등록해 주고 와야겠다. 그들의 소통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발표 지면,
엄마의 봄 「 서정문학」 2017년 3, 4월 54호.
마지막으로, 안양 윌스 병원, 병원장님이신 이동찬 선생님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의사와 환자와 병원이 삼박자가 맞았던 그 시간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