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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정원이야기 Mar 15. 2017

#40이름의 온도

나미래의 육아 이야기_아들의 이름을 부르는 온도는 몇 도가 적당할까?


  창밖 너머의 세상은 봄 햇살을 너그러이 받고 있다. 여러 이름을 가진 생명들의 새싹들이 꿈틀꿈틀 고개를 내민다. 마당이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작은 우리 집 땅에서도 자연과 사람이 만나는 3월의 꽃샘 경계는 길을 잃은 여러 생물들에게 다시 제 길을, 그들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만 같다.


  날이 풀리니 자전거를 꺼내 들고나가는 우리 집 아들도 신학기의 어색함을 극복하고 호기롭게 제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든든해 보인다. ‘지산아 잘 다녀와.’로 시작하는 아침 인사. 예쁜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체온의 온기만큼이나 이름을 지을 무렵의 온화한 감성이 전해오는 것만 같다. 예상했겠지만 나는 아들이 이상형이라고 감히 말을 하는 아들 바보다. 그렇지만, 우리 부부의 자식이 되어 함께 지내는 아들의 이름을 늘 그렇게 따뜻한 음색으로 부르지도 않는다는 것을 얼마 전 아들의 넋두리로 통해 더 자세히 알았다.

 

  “엄마, 엄마가 지~산아('지'보다는 '산'이 높아지는 음률)라고 부르면 얼마나 긴장되는 줄 아세요.”


  내가 잔소리나 야단을 치기 위해 아들을 잡으려는 순간의 음색을 그대로 포착한 아들의 말이다. 함께 사는 누나가 “이모가 화날 때 지산이를 부르는 톤이 있지. 암.”이라고 한마디를 거들어주니 아들은 그 사이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나를 채근하듯 신나 한다.


  순간 휑뎅그런 바람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시나브로 나는 정말 아들의 이름을 체온의 온도보다 낮게 차갑게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의 사연을 듣고 있다 보니 아들이 느꼈을 이름의 온도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 엄마가 지~산아 부를 때는 여기서 멈출지, 어떤 야단으로 이어질지 상상하면서 불안하거든요. 제가 잘못할 때도 있지만, 엄마는 내 얘기도 안 듣고, 화낼 때가 많아서요. 그리고 말하지 말라고 할 때도 많고요.”


  그랬던 것 같다. 밥상머리에서 밥알을 세고 있었을 때는 소위 아들 키우는 엄마들이 대놓고 잘 한다는 ‘욱’과 ‘야’가 입에서 어느 필터를 거치지 않고 나왔다. 친구들과 놀면서 깐죽거리는 아들을 볼 때(우리 집에서는 동네 골목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보이지 않을 때는 소리를 통해 감지해 내기도 한다.) 반드시 ‘지적’이라는 것을 했고, 노는 아이 중에서 목소리가 제일 크게 들리는 것에도 잔잔한 말을 깔고 참아보려는 행위에 앞서 이름을 부르고 훈계를 올렸다. ‘지적은 간단하게, 칭찬을 길게.’라는 말이 있는데, 왜 내 아들에게는 그런 것들을 다 무시하고 더 많은 지적과 잔소리를 하게 되는 것인지. 그럴 때마다 ‘엄마가 아니면, 누가 너에게 지적을 하며, 불통을 바로 잡을 것이며, 바른 인성을 키우게 해 주겠니.’가 나의 앵무새 같은 멘트이기도 했다.


  또한 ‘흥분한 목소리보다 낮은 목소리가 더 위력이 있다.’라는 말의 지혜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매번 아들에게 주의를 줄 때나 옥신각신하는 신에서는 흥분된 목소리가 입에서 바퀴를 달고 먼저 나가는지 모르겠다. 사실, 아들은 많은 정보력과 과제 흡수력이 높은 아이다. 투정을 부리면서도 하고 싶은 일들을 해낼 때가 많은데, 초등 저학년에 있는 아들로서 당연히 엄마 앞에서 부려야 할 투정과 요구를 나는 제대로 받아주지 못했다. 내 마음이 순조롭게 항해를 할 때는 아이의 어떤 행동도 차분한 어조로 받으면서 조금 거센 바람 앞의 항해에서는 손바닥을 뒤집듯 나의 언행이 그때그때 달라 빗나가는 것은 아니었는지. 어쩜, 가끔씩 스스로도 인정하기 싫은 자가당착에 빠져있지는 않았는지에 대해 글을 통해 반성해야 할 부분을 각인시킨다.  


  아들은 말하기 좋아하고, 질문을 즐기고, 서로의 눈높이 선에서 상대방에게 설명하며 토론하는 것을 즐긴다. 내게는 아들이 또 다른 어린 선생님 같은 존재다. 그런 아들에게 내 기분에 따라 말을 들어주는 것도 한계를 느꼈을 때 싸늘한 이름의 온도를 안겨주었다. 높은 온도(아들은 엄마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화를 내기 시작하는 온 시작점이 35도부터라고 했다.)의 아들 이름 뒤에 만만하게 억울한 감정이나 복잡한 감정을 표출했던 것이다.

 

  얼마 전, 다문화 대안학교에 출근을 해서 보니 그곳에 등교한 아이들의 수업태도는 조금 특이했다. 수업 두 시간 동안 줄곧 누워 있었던 학생을 비롯하여, 다른 날 수업에선 손에서 핸드폰 게임이 떨어지지 않고, 줄곧 그들의 언어로 수다를 떠는 아이들. 자잘한 웃음을 띠며, 그들과 소통을 위해 주의를 주면서도 애를 쓰는 나 자신이 신기했다. 이 모습을 내 아이에게도 그대로 전달이 된다면, 아들과 내가 티격태격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다른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 아이가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것을 몸소 느낀 하루였다.  


  대안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아들에게 얘기를 하자, “엄마, 그곳에서 계속 일 하세요. 아셨죠. 음, 어제 그것을 느꼈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라고 한다.


  감정 조절을 잘 하는 것과 말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했다. 가까운 곳에서 먼저. 특히, 아들의 이름을 부를 때는 숨고르기를 하고, 아들이 긴장하지 않는다는 35도 정도의 온도를 느끼게 해야겠다. 물론 표정까지도.


아이가 태어나고 이름을 짓게 된 연유를 리포트를 적어낸 적이 있었다. 그것이 이복규 교수의 책 한 면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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