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반도 거금도 금산은 유명하지 않다. 유명하지 않아서 더 좋다.
글을 담아놓고 있는 나의 브런치에 ‘거금도’와 ‘고흥 거금도 신금’ 그리고 ‘거금도 금산 신금’의 검색어가 반복되며 올라오는 것이 요즘 눈에 띈다. 7월 말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바닷가 휴가지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겠지만, 해수욕장이 없는 구체적인 친정 동네 이름까지 삽입하거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검색어가 들어오는 것이 특이사항이긴 하다. 예상해 보자면,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 나의 글을 찾기 위해 검색했거나, 이름은 모르지만 나를 알고 있거나, 입소문으로 거금도를 알게 된 사람들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글을 보고 한 번 들어온 곳으로 검색어를 타고 계속 들어온다는 것은 또 다른 작은 관심이기도 하니 기분 좋은 일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 나의 고향에 대한 글은 시로 표현하거나 단편적으로 바닷가 몇 군데 글을 적은 것에 불과하다. 이참에 거금도에 관한 이야기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의 추억거리와 버물려 썰을 풀어볼까 한다.
거금도는 다리가 생기고 난 후와 그 전의 모습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거금대교가 놓이기 전의 추억을, 주민의 생활모습을, 놀거리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지 않을 수가 없다. 2011년 고흥반도와 소록대교를 따라 거금대교가 연결되기 전까지는 철부선(이하 철선으로 칭함.)을 타고 섬을 오갔다. 철선을 타는 행위 자체가 어린 학생들에게는 놀이요, 만남의 장소이기도 했다. 철선의 크기와 견고함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많이 변했다. 기술적 혁명이 지배를 하고 있는 듯했다. 거센 바람에 정신없이 일렁이는 파도를 데리고 불안하게 항해를 하던 작은 철선들은 어느 순간 크고 멋진 철선 앞에서 그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지역 농협이 철선의 모든 지분을 가지고 있었던 시절, 기세 등등하고 코가 높았던 농협 근무자들의 자세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엄마와 함께 작고 낡았던 철선을 처음 타본 것은 내가 초등 3학년 무렵이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동차 몇 대 들어가지 않았던 작은 파란색의 철선이었다. 철선 안에 딸린 작은 방은 일찍 앞서기를 서두른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얀 거품을 일으키고 잽싸게 달아나는 파도를 피해 물기 머금은 갑판 위에 서 있거나 짐 위에 앉아들 있어야 했다. 철선이 바꿔지기를 몇 번, 2002년 12월부터 착공이 되어 10여 년 만에 완공된 거금대교를 보고 아버지가 한 마디를 한다. “살아서 완성된 다리를 다 보게 된다.”라고.
<2010년 3월, 배를 타고 거금도로 들어가던 시절, 녹동과 금진 이름의 철선은 금진부두로 향한다>
거금도에는 녹동항에서 철선이 드나들었던 두 곳의 부두가 있다. 거금도의 북서쪽에 위치한 금진 부두와 북동쪽에 위치한 신평 부두가 그곳이다. 전자는 대흥리 읍 소재지로 가깝게 갈 수 있는 위치에 있고 거금도를 입도할 때마다 내가 즐겼던 부두였으며, 후자는 사람들의 발길이 조금 뜸한 거금도의 북동쪽과 남쪽으로 쉽게 갈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다. 이 두 부두는 햇귀를 맞으며, 바다는 윤슬로 은빛 물고기 떼를 만들어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을 기다린다. 오전 7시에서 8시는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몰려드는 시간이다. 이처럼 첫배가 들어오는 시간은 들고 나는 사람들과 차량들로 진풍경을 자아내는데, 특히 농업과 어업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이곳 거금도의 주민들의 부지런함을 알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10년 3월, 금진부두는 늘 배를, 사람을 기다리던 곳이었다>
친정 엄마는 배를 타고 녹동 전통시장을 자주 애용하는 편이었다. 겨울이면 아버지와 함께 마른 김을 팔러 나가기도 했고, 전날 갯벌에서 잡은 낙지, 초봄이 되면 텃밭에서 키운 쪽파와 야채 등을 시장에 팔기 위해 철선을 자주 이용하곤 했다. 엄마의 상품이 꽤 좋았던 덕분인지 금진 부두에서 배를 기다리거나 녹동으로 건너가는 배 안에서 낙지를 다 팔거나 야채를 다 팔았다며 동이 난 함지 바구니를 들고 바로 들어온 날도 간혹 있었다. 어느 때부터는 농협 조합원에게 일 년 단위로 배표가 공짜로 나오기도 했다. 철선이 운행됨으로 인해 그 배에서 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는 갑판 위의 사람들은 농협 소속의 직장인이 되었고, 표를 끊는 부둣가 주변의 주민은 그로 인해 생계를 넉넉하게 이어가곤 했다. 이렇게 부두는 많은 사람들을 이어주고 인연을 만나게 해 주었다. 나 또한 연락하지 않는 친구들을 우연히 배를 타며 만나기도 했으며, 철선에 올라타 유학을 떠나는 딸의 모습을 보며 보이지 않는 곳까지 배웅을 하던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던 곳이기도 했다. 철선이 떠나고 난 자리에는 밀물과 썰물의 간극을 많이 느끼지 못했던 곳이었으며, 바닷물이 부두의 살갗을 품은 탓에 파래가 자라는 돌 주변에서는 발부리를 늘 조심해야 했던 곳이었다. 또한 전통 시장 이상의 인간미와 상술이 오갔던 곳으로 기억되곤 했다. 지금은 낚시를 즐기는 사람과 작은 배들이 오가며 다른 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듯하다.
<2011년 2월, 2011년 12월의 완공을 10개월 정도 앞 둔 시점이다. 아이와 나는 할아버지를 따라 동네 주변을 서성인다>
이제는 육지와 조금 더 가까워졌고, 교통이 더욱 편리해져 배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자유롭게 친정을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운전을 좋아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내겐 그저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늦은 시간에도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으니까. 배를 기다리는 시간만큼 일찍 집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을 얻었으니까. 거금대교 초입에 친정집이 위치한 덕분으로 읍 소재지로 들어갈 일도 녹동항 주변에서 해결을 한다. 친정 나들이만 있으면 1박 2일 계획으로 다녀오는 제주도는 우리 집 앞마당 같은 느낌이다.
<2014년 8월, 신금 마을 방파제는 우리 가족의 여름 놀이터다. 칼같이 더운 여름 날씨에 낚시는 죽음이다. 그래도 고향은 즐겁다.>
나는 다른 여행객들과는 다르게 바닷가 해수욕장 놀이보다는 친정 집 주변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아, 친정이 그곳에 있어서 그럴까도 싶다. 마을의 방파제, 동네 해안로 산책을 즐기며, 소리 없는 자연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바닷가의 풍경을 눈에 넣고 행복해한다. 배를 타고 다녔을 때도 그랬지만, 배를 타고 금진 부두에 도착하는 30분 여의 느린 시간이 제일 좋았다. 시골을 향하는 요즘, 철선과 부두를 거치지 않는 아쉬움을 몸에선 기억하지만, 어렵게 완공된 거금대교를 통과하며 창문을 내리는 것이 내가 하는 첫 번째의 일이다. 푸른 섬들이 파도와 놀고 있는 바다. 그 바다의 바람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몸은 태어난 고향을 기억한다. 바닷가에 몸을 담그는 것보다 아버지의 밭 주변을 살피는 것이 더 좋은 것을 어떡하리. 생명을 열었던 생물들이 계절마다 때가 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귀한 모습을 보며 힘을 얻곤 한다. 거금도 여행은 멍 때리는 시간에 고독한 시간을 얹어주며 바다의 이야기를 시골집에서 조용히 들으라 한다.
거금도 - Daum 백과
전라남도 고흥반도 서남단 도양읍에서 약 2.3㎞ 지점에 있다. 주위에는 연홍도·허우도 등의 유인도와 형제도·독도·오동도 등 무인도가 흩어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절리도(節吏島)라 불렸으며, 거억금도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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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금대교(居金大橋)는 전라남도 고흥군 금산면 거금도와 도양읍 소록도를 잇는 다리이다. 총 사업비 2732억원을 투입해 2002년 12월에 착공하여 2011년 12월 16일에 완공하였다. 총 연장 2028m이며 이 중 사장교 구간은 1116m, 접속교 구간은 912m를 차지한다. 대한민국 처음으로 자전거·보행자 도로와 차도를 구분한 복층 교량으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