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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정원이야기 Sep 23. 2017

연곡사 기행1, 가을 그곳에

지리산 연곡사 툇마루에서 커피 한 잔을 즐기며



슬픔이, 긴장이, 당혹감이, 내게 아니면 주변에 닥쳤을 때 마음과 육체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허공을 대고 가끔 물을 때가 있다. 어떤 형태의 말이 적절한지도 찾게 된다. 그러다 '어쩌면 좋니?'로 간단히 마무리되는 거. 그게 우리말의 정서이기도 한 것을 알고 나면 여러 말보다 짧은 말의 의미를 또한 이했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눈앞에서 답을 찾으려고 애를 쓰기보다 편안한 마음이 들도록 자연스레 그대로 두는 것. 이번 연곡사 기행이 바로 나에게 ,스스로 그리고 우리에게, 뼛속까지 편안해지는 봇물을 트이게 해 준 그 길이 아니었나 싶다.


하루미 언니의 출국은 언제부터 국내에 있는 어느 가까운 지인보다 자주 만나는 일정이 되었다. 비어있는 나의 일정과 맞추다 보면 밝고 짧은 하루를 마음껏 쓸 수 있는 여행지가 한 곳 들어오게 된다. 이번에는 연곡사였다. 앞으로 연곡사 주변은 나의 여행에, 아들과의 여행에, 잠깐의 사색에 빠져들기 좋은 곳이 될 것 같다.   



▲ 스님들이 지내는 방에서 바라본 연곡사의 경내 모습으로 이곳에서는 쌍계사나 화엄사보다 규모가 작아 절에서 지내는 스님들이나 보살들이 많지 않다고 한다. ⓒ나미래



넓은 지리산 산등성이 피아골 골짜기에 내려앉은 연곡사는 사람이 함께 하는 곳이었다. 직선 마을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 잡은 연곡사 절집은 새로 덧칠해가는 색감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 옛날의 명성을 조금씩 알리려 하는 것 같았다. 주변에 있는 화엄사나 쌍계사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오랜 역사와 위엄을 느꼈다고 해야 하나.


피아골에 자리한 연곡사는 역사가 깊다. 백제 성왕 22년(544년, 진흥왕 5년) 인도의 고승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소용돌이 치던 연못에서 제비 한 마리가 날아갔고, 연기조사는 그 연못을 메워 법당을 지었는데 그 절 이름을 연곡사(燕谷寺)라 한 이유다.  


템플스테이로 인연이 된 그녀와 연곡사의 사람들은 웃음이 넘쳤다. 주지 스님과 절집에 앉아 차담(茶談)을 나눴다. 우리들이 지나온 시간의 인연과 관계를 재미난 색으로 덧칠해주는 주지 스님. 스님의 입담으로 가을 높은 하늘을 타는 바람이 살짝 우리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듯했다.  




▲ 연곡사 지붕 처마 위에 걸친 가을 하늘이 새벽부터 내려온 우리의 일행의 피로를 덜어주었다  ⓒ나미래



뷔페식의 간소한 공양을 하면서 절에 대한 고정관념을 조금씩 깼다. 불교 사찰에서 사용하는 독특한 식기인 바루가 나오면 어떻게 공양을 해야 하나, 옆 사람을 보면서 눈치껏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익숙한 식기가 나와주어 긴장하지 않았다는 것. 워낙 사찰에 있는 사람들 수가 적어서 바루보다 더 간소화하여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이 적은 만큼 사람이 보이고, 사람이 돋보였던 절이 아니었나 싶다. 이젠 아들과 함께 다녀올 아지트가 생긴 셈이다.


공양을 마친 후, 친분을 이용해 얻어먹은 커피 한 잔은 절집에서 특별한 선물 같기도 했다. 공양 전에 한숨을 돌린 차담에서도 웃음이 찻잔 안에 들어가 있더니 화려한 커피 잔 안에도 그 웃음이 여전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연곡사는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의 지리산 피아골 입구에 있는 절이다. 국보 2점(동승탑, 북승탑)과 보물 2점(소요대사탑, 동승탑비)이 있다.


국보 제 53호인 구례 연곡사 동승탑은 높이가 300센티이다.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가 모두 8각으로 된 8각 원당형 부도로 도선국사의 유골을 안치한 묘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스님의 사리탑 가운데 가장 형태가 아름답고 장식이 정교한 작품이다. 탑의 아랫돌에는 팔각으로 구름 속의 용이 장식되었고 받침대는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길 66-7, 최참판댁 주변에 펼쳐진 너른 마당이 인상적이었다.  ⓒ나미래



대하소설 토지의 무대가 되었던 전통 가옥인 '최참판댁'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았다. 넓은 땅, 넓은 하늘, 높게 높게만 오른 가을 하늘의 뭉게구름과 새털구름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곳에서 익어가는 풍류의 노랫가락을 들어보라고 했다. 연곡사에서 자란 길상이 서희 아씨를 만나게 된 그 집 앞에서 그 이야기를 떠올려보라고 했다. 반갑게 만나보라고도 했다. 다시 읽고 또 읽고, 문체를 탐닉하던 그 머리를 이곳에서 식히라고도 했다.



▲ 최참판에서 바라본 평사리의 농촌 풍경 ⓒ나미래



넓고 너른 들판은 둥그런 산등성이에 몸을 내어주고 안온함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구름이 떠다니다 잠시 멈추고 있기에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따가운 햇살은 저만치서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는 가을을 시샘하고 있는 눈치였다. 집집마다 울타리에는 장두감이 가지를 안방 삼아 물을 올리는 듯 바쁜 속내를 털어놓고 있었을 것이다. 코스모스 한들거려 돌담에 머리를 부딪치고 맨드라미 붉은 닭 볏이 하늘을 향해 이랑을 그려놓고 사람들을 반겼다.



▲  최참판댁의 넓은 행랑채 ⓒ나미래




외롭게 홀러 선 고목이 새털구름인 듯한 가을을 품어내고 있었다. 귀한 풍경을 보고 바람은 살짝 도망이라도 간 듯 땡볕의 여름 기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른 들판을 마주한 이 고목은 많은 사연을 담고 온 사람들을 날마다 만나고 있었고 또 떠나보냈겠지.




새벽 5시부터 공항에서 시작된 이번 여행은 또다시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 되어주었다. 남은 것은 많았다. 가을이 남았다. 사람이 남았다. 그리고 마음이 남았다. 우리가 남았다.





<절 툇마루 커피 한 잔>

 

파닥거리던 피아골 계곡의 그 바람

높게 자란 가을 햇발에 발부리가 걸리며

절간 문 앞에 동그마니 서서 비척거린다

연곡사 툇마루를 지나치다

날아오는 커피 향에 문턱을 넘어

오묘하게 섞인 인연의 언어 풀이를 엿듣고 만다

주지 스님의 하늘 염색 옷자락에 매달려

두 여인의 과거 행적에 고개를 끄덕여주고

비어 가는 커피 잔을 들여다보며 눈길 서성인다

9월에 놓인 절을 두른 꽃무릇 잔치에서

바늘 가지 꺾어와 커피 잔에 꽂아 두고 돌아선다

기둥을 붙잡은 처마도

가슴 타는 오후의 한숨을 걷어내고자

커피 한 잔과 꽃 한 잔이 익숙하다 말하는 것 같다

짙은 봄을 볶아낸 모시 송편이 어울리지 않게 멋을 내고

껍질 속 땅콩을 꺼내 속세를 깨물어본다

차담(茶談)이 비담(啡談)이 되어도 좋다고


<절 툇마루 커피 한 잔, 나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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