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래의 에세이, 엄마의 어린 시절도 있었다
<자유롭게 사는 재미> , 나미래
딸보단 아들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남자아이들과는 싸워서 지기 싫어했었다. 한 대 맞고 나서 울면서 나도 좀 더 힘센 남자로 태어났으면 하고 바랐다. 그들이 가진 남자다운 호기로움 때문이었으리라. 학창 시절엔 집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나에게 자유분방함을 온몸에 발라주었다. 어디든지 자유롭게 늘 떠나고 싶었다. 학교에서 실시하는 외박 캠핑과 산행을 누구보다 먼저 신청을 했다. 그리고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친구들과 놀다 늦은 저녁 담을 넘는 것도 예사로웠다(대문을 열면 소리 때문에 아버지가 깰 수 있었다). 노곤한 몸으로 일찍 잠들었던 아버지 덕분에 제대로 한 번도 걸려본 적이 없다.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 넘어가 준 것은 아니었을까?
아들을 낳으면서 내가 이루지 못했던 성별의 한을 풀었다. 시댁이나 친정에서 아들을 낳으란 압력을 넣어준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설렜다. 내가 그랬다. 물론 딸에 대한 희망사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이후 어지간히 노력을 했지만 실패로 돌아간 둘째 및 딸의 희망. 나 같은 자유분망한 딸이 태어난다면 좀 많이 키우기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결혼생활이 회를 거듭할수록 나의 뜻대로 되는 것은 극히 일부라는 것을 알았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자면, 내게 있어 아들은 순발력과 정보 흡수력이 빨라 일상에서, 또는 여행에서 참 좋은 파트너다.
우리 부부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같은 동네에서 자란 우리 부부는 놀이문화의 영역이 비슷했다. 도로와 모래사장의 경계가 짧았던 신작로에는 갯벌의 짠 내가 진한 마을 회관 마당이 있었다. 같은 또래, 나이 많은 언니 오빠, 동생들과 하나가 되어 전쟁터가 되었다.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으며, 땅에서 받아낸 놀이문화를 그대로 흡수하고 있는 기억은 내겐 참 각별한 추억이다. 그렇게 놀면서 인연이 된 아이들은 같은 학교로 진학을 했다.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목소리가 컸고, 오지랖이 넓고 친화력이 발달했다. 갯벌에서의 각종 체험은 이미 어린 시절에 완벽한 습득을 마쳤다고 볼 수 있다. 풀숲을 헤치고 논밭을 가로질러 뛰어다니던 그 무대는 집이 아닌 오롯이 나만의 바깥 여행지나 다름없었다. 억압되어진 집에서의 모습과 자유로웠던 바깥에서의 모습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들도 분명 이런 모습을 숨기고 있으리라 짐작이 간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면서 나의 목소리의 힘과 싸움 승부에 걸림돌이 생기기 시작했다. 현재 나의 남편. 그 남자아이가 관계 영역을 넓혔기 때문이다. 남자아이들을 끌고 다니는 남편은 호기로운 리더십으로 똘똘 뭉쳤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여자 아이들과는 자주 의견 충돌이 일어났다. 집에서 얌전히 지냈던 기억은 적어도 내게는 없다. 초등학교를 되새기는 모든 기억의 99%는 친구들과 어울리며 놀았던 것이 전부였던 그때. 나는 적어도 남자아이들에게 밀리지 않는 똑같은 성性을 유지하고 싶었다. 가족 형제들 중에서도 그냥 묻혀서 성장해야만 했던 네 번째였다. 그러나 나는 주도적으로 힘을 발휘하며 형제들 사이에서나 남자아이들의 영역에 서나 끊임없이 부딪히며 나를 집어넣고 있었다.
엄마도 남자 같은 나를 다루는 데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차분하게 말을 하기보다 무언가 부산스러웠다. 화도 잘 내고, 종알종알 말도 많은 데다 지금의 내 아들보다 잔소리를 더 듣기 싫어했다. 특히 말대꾸 잘 하는 나에게 엄마는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늘 우리들 앞에선 야단을 치지만, 아버지 앞에서 무력해지는 엄마의 모습은 내 이상형의 여성상이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다른 무엇보다 아버지의 몇 마디에 늘 억압을 받고 있는 듯한 엄마라는 여자. 그런 여자의 모습보다 당당한 남자의 성장을 바랐는지 모른다.
그래서 언제부터 나는 나를 밖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십대 초부터 경험했던 전국 산악회 활동, 일본 유학, 캐나다 단기 어학 연수, 여러 나라에의 호기심, 프리랜서 기업 출강 등은 자유로운 ‘일상에서의 여행’의 단어와도 일맥 상통하는 부분이 많다. 왁자지껄한 대화의 시간도 있었고, 때론 사색이 진한 방황이 끼어들기도 했다. 뼈에 외로움을 가득 입히는 혼자만의 여행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던 기회는 돈으로 살 수 없지 싶다. 나는 참 자유로운 인간형이었다. 어디에 얽매이지 않고 말이다. 그렇다고 항로를 비틀면서 튀어보지는 못했다. 이 점은 아직까지 후회가 남는다.
지금은 차분하게 주변 사람들을 만나고 있지만, 오래전엔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모임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 예전 움츠려 있는 엄마 같은 여자가 되기 싫었던 것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동네 남자 친구들이 아닌, 아버지 같은 남자가 아닌 멋진 남자들이 옆에 있었으면 하고도 바랐다. 거기에 성품까지 부드러움을 가미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이상과 꿈은 생각보다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준 것이 결혼이었다. 그때는 좋아하지 않았던 한동네 동갑내기 남자 친구(실제 중학교 일기장엔 내가 싫어하는 동네 남자로 남편의 이름이 적어져 있었다)를 다시 만나 결혼을 하게 되다니!
아들은 나보다 더 많이 사고의 영역이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그래서 힘이 되는, 마음이 놓이는, 그런 여행을 자주 많이 다녔으면 좋겠다. 넓고 복잡한 곳도 혼자서 다녀보며 스스로 자신의 한계에 도전을 해봤으면 좋겠다. 아마 그럴 것이다. 게다가 건강하면서 호기로운 성격으로 부드러운 남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까지 올리고 싶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더 넓은 곳의 시야 확보를 통해 ‘내’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에서 ‘공감’하는 사람, ‘공감’을 해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꿈이 직업이 될 수 없는 경우도 많지만, 깊이 고민하고 사색하면 좋겠다. 경쟁에 쫓겨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것을, 놓치지 말고 찾아 가는 시간을 누렸으면 좋겠다. 그것이 자신에게 큰 자산이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앞으로 수없이 겪게 될 소소한 일상과 눈높이가 다르지 않은 자신의 올바른 생각이 가까이 다가왔으면 좋겠다. 엄마가 자유롭게 그래 왔던 것처럼.
나의 책상머리에 ‘덜 참견한다.’ 말을 적어놓았다. 나와 너의 오늘을 응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