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새해를 시작한 지 벌써 일주일 여가지나갑니다. 올해는 조금 특별하게신년을 맞았습니다. 새해를 시작한 다음 날 아버지의 부고를 받았기 때문이죠. 며칠 장례를 치루고 복귀하니 제때 버리지 못한 집안 쓰레기가 눈에 크게 들어오더군요. 말끔하게 정리하고 아버지 생각에잠시 젖어봅니다.
아버지는 평생을 살아온 고향집 부근 요양원에서 1년 6개월을 치매 환자로 지내셨어요. 이후, 전남 모대학 병원에서 담도암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관리가 필요하다 싶어 동생이 있는 대전 인근의 한 요양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는데요. 결국 이곳에선 4개월 여 병원 생활을 하다 가시게 되었습니다.
기억과 말을 잃어버린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시간은 무척이나 아렸지만, 기쁨 마음으로 오롯이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운전대를 잡을 수 있었던 얼마간의 시간이었습니다.
임종 당일, 위독하다는 의료진의 전화를 받고 2시간 여를 달려 다행히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2~3일은 견뎌줄 것 같다는 말에 시골에 있는 엄마를 모셔 임종 면회를 맞게 해야되겠다 마음 먹었죠. 대전 병원에서 거금도 금산 시골을 향해 출발한 지 30분 후 쯤 아버지의 운명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되어버렸네요.
며칠 동안, 오롯이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아버지만을 생각하고, 아버지만을 불러보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아버지 편안히 좋은 곳에서 영면하시길 기도합니다.
거금도 금산 신금마을, 부친의 장례 노제에서 조사를 읊으며.
아래 글은 아직 노제의 문화가 남아있는 시골 고향 마을에서 동네 어르신과 친족들을 모시고 제가 아버지를 위해 읊었던 조사(弔詞)입니다. 원본 글에서 약간의 각색을 하였습니다.
안녕하세요.
부친을 보내는 신금마을 노제에 함께하신 동네의 조문 어르신들, 친지분께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고 김재남 님의 셋째딸 김미례입니다. 오늘 이렇게 이승에서 맺어진 부녀라는 인연으로 조사(弔詞)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부친과의 추억 중에서는 겨울철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철이 들면서는 먼 바다에서 달려오는 우악스러운 파도와 함께 신금 마을을 탈출하고 싶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또한 그 시절부터 아버지와 티격태격 싸우던 사춘기 방황이 이제는 단단한 정을 쌓게 한 것은 아닌가 싶네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병원에 누워있을 때 제가 쓴 책의 내용을 읽어드린 적이 있습니다. 거친 숨소리 사이로 눈은 감고 말을 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아버지는 익숙한 내용에 맞닥뜨렸다고 느꼈던지 눈을 움찔움찔했는데요. 오늘 그 책의 한 대목을 여기 모이신 분들에게 함께 읽어드리며 부친과의 추억을 되새기고 "그래도, 그래도 우리 아버지 참 잘 살아오셨다"라는 말을 남겨놓고 싶습니다.
詩詩한 여행에세이 [나는 아들과 여행한다] 중에서.
제목은 [아버지의 겨울국]입니다.
거금도 신금은 제게 있어 늘 그리운 곳입니다. 화려한 꽃비로 물이 오르는 봄, 곡식들의 살이 오르는 맹렬한 여름, 오색 날리는 서릿가을, 바다의 푸른빛이 왕성해지는 겨울, 이 모든 계절에서 산과 들, 바다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계절마다 먹을거리가 풍부한 이곳 신금은 제가 태어난 고향이기도 하며, 남편이 유년시절을 보낸 그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고 김재남 아버지>의 오래된 고향이기도 합니다.
저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팔색조로 변신하는 고흥반도를 자주 찾습니다. 친정 여행은 향토음식을 맛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죠. 또한 여든이 넘은 아버지의 추억 여행에 동참하는 것은 이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운 놀이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 뒤에 보이는 신금 방파제는 아버지의 오래된 소소한 일상을 엿볼 수 있었던 곳입니다. 오늘은 아버지가 생전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겨울의 한 장면을 살짝 공개하겠습니다.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그악스러운 바닷바람을 뚫고 살아온 진정한 사내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나이를 먹었죠. 남의집살이 10대, 궁핍함의 20대, 30대 이후, 바다와 함께한 그 이후 생활은 휴식이 없는 직진만 있었을 뿐이었죠.
아버지의 겨울 생활의 대부분은 김생산, 해우를 하던 몸부림이 전부였습니다. 마당 한쪽에 세워진 허름한 창고는 아버지와 엄마가 해우를 뜨던 일터였습니다. 평균 새벽 2시 정도면 일을 시작하죠. 동이 트기도 전에 딸 중에 막내였던 제가 눈을 비비고 들어서면 부모의 일이 교체가 됩니다. 김을 떴던 아버지의 작업은 엄마가 이어받고 엄마의 일은 제가 이어받아 새로운 팀을 꾸려 일을 했었죠.
엄마와 딸이 한 팀이 되어 일을 시작하면 아버지는 잠깐의 휴식을 취합니다. 새벽 밤공기에 차가워진 국 냄비를 난로 위에 올려놓고, 말이죠. 이른 아침부터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했어요. 그 술 한 잔에 국물을 한술 뜨며 지친 몸을 달랬던 것입니다. 그 국은 저녁으로 먹고 남은 매생잇국이었습니다. 매생잇국은 이미 시려진 아버지의 몸을 따끈따끈하게 속을 풀어주었을 것입니다.
왠지 모르겠지만, 저는 김이나 매생잇국을 먹을 때면 자연스럽게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끊이고 또 끓여도 연기가 나지 않는 매생잇국. 비슷하리만큼 바보스럽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사셨던 우직했던 아버지였습니다. 그렇게 국물을 후후 불며 국을 마시던 아버지의 등이 편안해 보였습니다. 휴식을 찾고 있는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던 거죠.
오래 끓이면 매생이의 걸쭉한 끈적끈적함이 남지 않죠. 아버지가 애정을 표현했던 방식 또한 오래도록 몽근하게 올라오는 시간을 품은 셈이었습니다. 짜디짠 생물을 끓여내면 어느새 달콤함을 내어주는 국물맛. 아버지가 그랬습니다. 그 정과 사랑은 아내 장옥희, 우리 자녀들 김추자, 김추미, 김미례, 김용기, 그리고 일찍이 고인이 되어버린 고 김춘일에게도 각자 느끼게 하는 몫이 되어야 하죠.
아들로 태어나서, 사위가 되었고, 아버지가 되어갔던 일생의 통과의례 속에서 여러 계절의 순간에 겨울 노동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겨울 이야기를 쓰다 보니 하늘의 별이 되어버린 날이 깊은 겨울의 어느 날이군요. “아부지, 김재남 아부지! 잘 살다 가신 또다른 길을 응원합니다.” 퉁퉁 부은 발과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은 따사로움으로 다시 승화할 것으로 믿습니다. 아부지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녀식 김미례 드립니다. 편히 쉬십시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