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떡으로만 살 수 없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살아야 한다. '사랑'은 한 사람이 진정한 '인간'으로서 바로 설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사랑이 결여된 사람에게서 인간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랑은 물질이 아니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행동만이 존재를 증명해 줄 뿐이다. 그 증명 가운데 하나가 ‘희생’이다. 사람은 희생을 통해서 사랑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어린 시절 받았던 사랑은 곧 부모님의 희생이었다는 것을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되면 깨닫게 된다. 내가 지금의 나로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 그 사실 하나를 때로는 수십 년의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기도 한다.
희생이란 무엇일까?
상대방을 위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나의 소중한 것을 주는 것이다. 희생이란 강요할 수 있는 성격의 가치가 아니다. 당연히, 강요를 당해서도 안된다.
우리나라는 반세기 만에 가난을 극복하고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의 많은 나라가 부러워할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영향력이 켜졌다. 이는 수많은 국민의 희생이 있었기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나라를 위한 사랑이 나라를 구한 것이다. 국민들의 나라 사랑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국가적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모여 서로 자기 것을 내어 주며 어려움을 극복한다. 같은 마음으로 모여서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일은 희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희생’이 오늘날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었다. 곳곳에서 희생이 넘쳐나니 ‘희생하는 일’을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었던 것일까? 이 문제는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자라나서 하나의 문화로까지 자리를 잡았다. ‘희생을 강요하고 있는 문화’가 자라난 것이다. 이런 현상은 ‘갑질'이라는 이름으로 대중화되었다.
사랑이 빠진 희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더 이상 희생이 아니다. 무리한 요구는 돈으로 맺어진 현대판 노예 관계일 뿐이다. 대기업과 하청사 사이의 갑을관계, 상사와 부하 직원 사이에서 당연시되는 요구들, 빠른 배송 문화를 받치고 있는 불합리한 시스템. 스펙 쌓기가 만들어 내는 부조리 등 '강요된 희생'이 만들어 내는 문제들은 사람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려 인간답게 살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기업을 사랑으로 운영하는 게 말이 되는가? 기업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조직체임을 모르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맞다. 전적으로 맞다. 그러니까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사이의 경제 관계는 대등한, 서로를 인정해 주는 ’가치 교환 관계‘가 되어야 한다. 종속관계가 아니라. 경제 활동이라는 것을 하는 기업이라면 그 누구보다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과거에는 가난 때문에 고통 속에 살았고, 오늘은 풍요로움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보다 더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감히 발전했다고 말할 수 없다. 가난은 면했지만 지혜로움과는 아직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지식은 넘치지만 지혜는 질식해 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강요된 희생에 저항하자.
사랑으로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아닌 이상, 노동력을 값싸게 제공하는 일을 당연하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일제로부터 독립한 직후도 아니고, 전쟁을 겪고 난 폐허 속도 아니다. 일그러진 공산주의 체제는 더욱 아니다. 때문에 기업의 발전을 더 이상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방법으로 이루어나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의 희생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는 사회라면,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어리석은 사회다. 이제는 희생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하는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사랑이 없는 희생. 그것은 단지 부조리일 뿐이며,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만들어 내기만 하는 죄악일 뿐이니까.
우리 사회는 복지가 절실하다.
사람들은 삶의 질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유럽의 복지 국가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복지란 물질의 풍족을 누리며 사는 게 아니라 ’인간답게 사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복지는 '상대방의 희생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원칙을 만들어 내야 한다.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기 위해 CCTV를 늘리기보다 상대의 희생을 인정하고 고마워하며 그 대가를 온전하게 지불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복지사회다.
조용히 물어보자.
우리는 진정으로 복지를 원하고 있을까? 남들과 차별화된 위치만를 확보하기 위해 오늘도 경쟁적으로 달리고 있는 건 아닐까? 복지는 도입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처한 현실을 인식하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갑질'만 제대로 없애도 우리는 복지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