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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래지기 May 19. 2017

소유의 종말/제레미 리프킨

접속은 소유를 독점한 결과다

  소유의 반대말은 ‘무소유’다. 버림을 강조하고 예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제레미 리프킨에 따르면 소유의 반대말은 ‘접속’이다. 실생활에서 무소유는 접속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건이나 자본을 직접 소유하고 관리하는 시대에서 필요할 때만 요청해서 쓰는 ‘접속’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는 주장. 왜 소유함의 반대편에는 접속이라는 개념이 손을 흔들고 서 있는가?


접속의 시대는 <우리는 타인과 맺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관계를 과연 어떤 방향으로 재설정하고 싶어하는가>라는 근본적 물음으로 우리를 내몰 것이다. 접속이라는 것은 참여의 수준만이 아니라 참여의 유형을 결정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참 많은 것을 소유한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하다는 ‘의/식/주’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 가지를 ‘갖기’위해 평생에 걸쳐 엄청난 노력을 하며 살아간다. 누구나에게나 필요한 이런 기본 조건마저 21세기에는 소유가 아닌 접속의 개념으로 바뀐다는 것다. 그렇다면 정말 ‘소유’는 불필요한 것이 되었을까? 내가 가지고 있지 않아도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요구해서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편리하고 좋은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이 책의 원래 제목인 “The Age of Access”처럼.   


시장은 네트워크에게 자리를 내주며 소유는 접속으로 바뀌는 추세다... 재산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새로운 경제에서 재산을  장악한 공급자는 재산을 빌려주거나 사용료를 물린다.

  

  ‘4차 산업 혁명’은 대세다. 그 어떤 어느 나라도 이 소용돌이를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많은 물질을 ‘소유’하고 수많은 서비스에 ‘접속’하는 이유를 맥루한식으로 말한다면 모든 미디어는 ‘인간의 확장’이기 때문에 그렇다. 과거 라디오와 전화가 우리의 귀(청각)를 확장시켜 주었고 TV와 카메라가 눈(시각)을 확장시켜 준 것처럼, 인공지능과 로봇은 우리의 뇌와 몸 자체를 확장시켜 준다. 확장시켜 준다는 말은 나만 가지고 있었던 것을 다른 곳으로도 나누어 준다는 뜻이다. 소유권을 다른 곳으로 넘겨주고 나는 필요할 때에만 접속해서 얻으면 된다. 관리할 부담이 사라진다. 접속만 보장되면 된다, 다만.      


공급자는 고객에게 물건이 파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는 고객이 상업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노하우와 식견을 빌려줄 뿐이다.


  접속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휴대전화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전화번호를 기억할 필요가 없다.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맞춤법에 대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자동차도 소유할 필요가 없다. 필요할 때 우버나 카카오택시를 부르면 그만이다. 주차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편하기까지 하다. 수많은 것이 접속 서비스다. 우리는 접속하기 위해 지불해야 할 돈만 소유하고 있으면 된다. 돈은 ‘메타가치’가 된다.

    

재산을 소유하지 못하고 접속만 하게 될 때 우리는 타인에게 훨씬 더 의존하게 된다.


  많은 이들이 ‘플랫폼’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메타가치’를 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배우 박중훈은 어느 인터뷰에서 “돈을 벌게 해 주는 것은 시스템”라고 말했다. 맞다. 아무리 잘 설계된 계획도 기반 구조가 없이는 날아오를 수 없다. 새도 둥지가 있는 새가 멀리 나는 법이니까. 왜 부동산에 투자를 하는가? 접속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어야 매달 사용료를 지불하는 이용자를 거느릴 수 있으니까. 왜 인터넷 서비스를 만들려고 하는가? 가입한 사용자 수가 만들어내는 경제적인 가치를 소유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플랫폼의 가치는 접속에서 판별된다고 이야기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을 독점적으로 소유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독점을 해야 접속의 가치가 극대화 된다.

   

소유는 물질이 희소하던 세계에서 인간 관계를 구조화하는 요긴한 장치였다는 사실을 맥퍼슨은 우리에게 환기시킨다. ... 물질의 희소성을 극복한 사회에서는 비물질적 가치가 우위를 점하며, 자기 실현과 자기 변신에 사람들의 관심이 몰린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접속’이라는 개념은 ‘소유’를 인수분해한 것이다. 소유한다는 개념을 접속이라는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인터넷 서버에 있는 파일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려받아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에 저장하면 내 것이 된다. 정말일까? 인터넷의 속도가 저장장치의 속도를 능가하고 1초도 예외없이 항상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파일에 접속하는 것일까 파일을 소유하는 것일까? 인간은 누구나 맨 몸으로 태어나서 맨 몸으로 떠난다. 살면서 매타가치를 지불하고 사는 수많은 물건과, 맺게 되는 수많은 인간관계. 이 모든 것이 생명이 머무는 시간 동안 ‘접속’하고 경험하는 대상일 뿐이다. 내가 접속하는 대상이 나와 가깝다고 느낄수록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그 거리가 영향력을 미칠 수 없을 만큼 멀다고 느끼기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소유한다는 것은 환상일 수 있다.   

   

서로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세대는 문화를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신뢰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다.


  리프킨이 이야기하는 ‘접속의 시대’를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양극화 시대’다. 소유하는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유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차라리 누구나 소유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접속할 수 밖에 없는 불행한 시대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솔직할 것이다. 왜냐하면 접속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소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많이 소유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접속하게 된다. 아니, 접속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가진 사람이 더 갖게 되는 사회, 많이 소유할수록 영향력마저 더 많이 ‘소유’하게 되는 사회에 대하여 이 책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접속으로만 치닫게 되고 문화와 인간 자체가 상품으로만 존재하게 될 때 우리의 정신과 인간관계는 망가질 수 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가장 깊은 인간의 교류는 언제나 지리적 공간에서 일어난다. 문화 체험은 방송 매체와 사이버스페이스를 통해 다른 지역으로 전달될 수 있지만 원산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진정한 의미의 공유를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줄어든다. ... 모든 현실 문화는 지리적 공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친밀감은 지리적 공간에서 움트기 때문이다.

  

  누군가 거대한 플랫폼을 고안할 때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큰 그림을 그려 치밀하게 설계할 것이다. 개인이라면 이 플랫폼에 맞서 힘겨운 각개전투를 벌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개인이 아닌 집단지성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를 이루어 접속한다면 독점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고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시민적 가치관이 아닌 기업적 가치관에 대항하는 민주적인 방법이며, 양극화와 상업화에 대항하는 큰 그림이다.



<소유의 종말>

제레미 리프킨 지음 /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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