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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래지기 Aug 18. 2017

전자책은 책인가?

책의 가치는 물질성에 있다.



  나는 지금 워드 프로세서로 글을 쓴다. 타자기 같은 독립형 사무 기기가 아니라 PC에 설치해서 쓰는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이다. '워드 프로세서'라는 말은 1970년대에 등장했다.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로 변하고 컴퓨터 자격증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는 사이에 ‘원고지’는 역사박물관에 진열돼야 할 운명에 놓였다. 원고를 컴퓨터로 작성하는 이유는 하나만 제대로 만든다면 여러 매체에서 손쉽게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 가능성’과 '다형성'이다. 워드 프로세서에서 글쇠를 몇 번 누르는 것 만으로 블로그에 올릴 수도 있고, 동시에 이메일로 보내 잡지 칼럼으로 기고할 수도 있다. 굳이 원고지가 필요하다면 <아래아 한글>에서 ‘원고지 쓰기’ 기능을 호출하면 된다. 이제 원고지는 소프트웨어의 기능으로 구현되어 필요할 때마다 모사emulate된다. 뿐만 아니다. 작성한 원고를 PDF 포맷으로 저장해서 <부크크>나 <아마존> 같은 자가출판 서비스에 올리면 책이 된다. 그것도 한 차례만 올려서 종이책paper book과 전자책ebook을 모두 출판할 수 있다. 원고가 디지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전자책이 나오기 전에 종이책은 그냥 ‘책’으로 불렸다. 마치 디지털이 등장하면서 아무런 이름도 없었던 우리의 일상이 ‘아날로그’가 되어 버린 것과 같다. 이제 세상은 Real과 Virtual이 공존하는 세계가 되었다. 이 두 세계는 평행선으로 마주보는 게 아니라 비빔밥의 미학처럼 ‘디지로그’로 존재한다. Virtual Reality가 되는가 하면 Real Virtuality가 되어 우리의 감각을 사로잡는다. 책도 아날로그 세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책 속에 담긴 콘텐츠는 디지털이라는 옷을 입고 전자책으로 환골탈태한다.



  종이책이 전자책이 된다는 것은 매체가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포맷format이 바뀌는 것이다. 포맷이란 내용과 분리된, '따로 노는' 그릇이 아니다. 포맷이 바뀌면 사람들은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래서 종이책을 읽는 습관과 전자책을 읽는 습관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봐야 한다. 포맷이 바뀌면 내용도 달라진다. 트위터에 쓰는 글과 블로그에 쓰는 글은 다르다. 비록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더라도 페이스북에 ‘올리는’ 글과 책으로 ‘출판하는’ 글은 같은 글이 될 수 없다. 내용은 형식을 벗어날 수 없고, 형식은 내용을 정의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기는 법이니까.


  종이책의 시대가 저물고 전자책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시끄럽지만 현실은 공존을 모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책이 전자책으로 완전하게 대체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대체된다면 그 때는 언제가 될까? 새로운 콘텐츠가 전자책을 선호하고 그 양이 종이책을 능가할 때, 그래서 우리의 책 읽는 습관이 바뀔 때 전환이 일어날 것이다.      


pakutaso.com


  전자책이 가진 장점은 무게가 없다는 점과 검색 가능성이다. 종이책에서 구현한 하이퍼텍스트는 ‘찾아보기’나 ‘각주’가 고작이다. 하지만 <정의란 무엇인가>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서 ‘신자유주의’가 들어간 문장을 모두 찾아 비교해야 한다면 우리는 전자책을 선택할 것이다. 검색 가능성이란 디지털의 특징이니까. 전자책이라는 포맷이 마냥 효율적인 것 만은 아니다. 외부 에너지에 의존적이라는 약점이 존재한다. 전자책이라는 콘텐츠를 보관하는 하드웨어에 전기 에너지를 공급할 수 없다면 전자책은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고 만다. 무인도에 가기로 했다면 우리는 종이책을 집어 들 것이다. 무한 복제가 가능하다는 디지털의 특징도 전자책 약점이 된다. 워드 프로세서 책의 내용을 옮겨 적으면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무한히 배포할 수 있다.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절대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책을 읽는 사람 가운데에도 소수만이 평균 독서량 이상의 책을 읽는다고 하니, 독서계도 양극화가 지배하는 셈이다. 전자책은 누가 찾을까? 평소에 책을 읽는 사람들이 전자책도 찾는다.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책과 세계> 강유원     


  책은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만든 여러 포맷 가운데 하나다. 책의 내용이 다양한 포맷으로 구현되는 시대에 굳이 종이책을 고집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책의 본질이 내용이 아니라 그 형식에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종이책은 재편집은 물론이거니와 검색도 안된다. 태블릿 PC처럼 전기로 작동하는 것도 아니어서 반사되는 빛이 없으면 내용을 읽을 수 없다. 게다가 콘텐츠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무거워진다는 물리적 약점도 존재한다. 책은 불편하다. 그러나 책이라는 사물은 그 어떤 매체도 주지 못하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종이책이라는 물체가 지닌 '고유한 형식'은 전자책과 비교할 수 없는 습관과 문화를 만들어 낸다. 쉽게 복제할 수 없는 매체에 담기는 내용이 우리로 하여금 다시 돌아보게 하고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게 만든다. 우리는 책을 통해 인내하는 법을 배우고 때로는 향수에 빠져들기도 한다. 종이책의 정체성은 물질성에 있는 것이다.     

  

  전자책이 종이책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만약 책이 주는 경험을 재현하지 못한다면 100년이 지나도 전자책은 전자책으로만 남을 것이다. 종이책이 전자책이 될 수 없듯이.


▨ 미래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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