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가분하면서도 찝찝한
시원섭섭하다 | 형용사
(1)【…이】 한편으로는 답답한 마음이 풀리어 흐뭇하고 가뿐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섭섭하다.
큰딸을 시집보내고 나니 마음이 시원섭섭하구나!
막상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니 시원섭섭하였다.
(출처: 우리말샘)
나는 연구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다. 일하다, 라는 표현이 맞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실험실에서 계량하고, 실험하고, 기구를 다루는 Wet lab이 아니라 컴퓨터로 데이터 분석을 하는 Dry lab에 있기 때문에 출근을 잘 안 하기 때문이다. 재택대면혼합근무라고는 표현하는데 거의 재애애애애택대면 느낌이랄까. 뭐, 그래도 귀여운 월급 받고 근로계약서를 썼으니 일하고 있기는 한 것 같다.
연구 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연구를 할 때마다 제일 어려운 것은 주제 잡는 것이다. 괜찮아 보이는 주제를 잡으면 이미 누가 했다. 남들이 안 한 주제를 잡으면 결과가 안 나온다. 특히, Dry lab은 이미 제공되는 원시자료나 공개데이터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러면 하루종일 데이터를 뜯어보고 있어도 뾰족한 주제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지만 주제를 대충 잡을 순 없다. 주제는 어떤 종류의 학술지, 얼마나 영향력이 큰 저널에 투고할 수 있을지를 결정하는 요인들 중 거의 가장 큰 요소이기 때문이다. 들인 노력은 비슷한데, 주제가 안 좋아서 점수가 낮은 저널에 투고하면 약간 억울하지 않는가?
이번에 진행하고 있는 연구 중 하나는 주제를 잡는 데에만 한 달이 걸렸다. 중간에 한 두 번쯤 엎었다. 자료 종류도 바꿨다. 그래서 주제를 딱 정했을 때 '아싸, 이제 통계 돌리기만 하면 된다'라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이 컸다.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썩 마음에 드는 주제는 아니라 찝찝한 마음이 있었다. 교수님은 그런 이상한 감정이 든 내 얼굴을 보고 "마음에 안 들면 딴 거 하든가"라고 말하기는 했는데... 막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니다. 한 달 동안 내가 통계를 돌린 여러 주제의 결과가 다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이번 주제는 결과가 예쁘게 나올 것 같고, 과학적으로도 설명이 예쁘게 될 것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비슷해 보이는 선행 연구가 몇 개 있어서 큰 메리트는 없고, 왠지 선행 연구의 피인용수를 보니 제출된다 해도 인용이 별로 안 될 것 같고, 내가 앞으로 가고 싶은 세부 전공과 전혀 관련은 없는 분야이다. 물론 내가 그런 걸 따질 경력이 아니긴 한데, 자꾸 더 나은 주제는 없었을까?라면서 질척이게 된다.
'시원섭섭하다'라는 감정 표현이 있다. 답답한 마음이 풀리어 흐뭇하고 가뿐하나 (→ 간만에 논문을 쓸 수 있는 좋은 주제가 나옴) 다른 한 편으로는 섭섭하다 (→ 마음에 100% 드는 주제가 아니고 메리트가 적어보임). 난 이런 감정을 주변 사람에게 이야기할 때 "좋은데 별로라 애매해."라는 식으로 말했다. 다들 뭔 배부른 소리냐, 그래도 문제가 해결이 된 거면 좋은 거 아니냐며 질타하기는 했었다. 그런 반응에 '그래, 내가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닌데, 너무 속좁은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사전에 이런 감정에 대한 표현이 있는 것 보면 아주 정상적인 생각이고, 느낌인 것 같다.
아니면, 모든 한국인이 속이 좁든가!
p.s. 요즘 아래의 밈이 정말 딱 어울리는 상황이다.
원본 밈은 software development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논문의 완성 과정이라는 짤로 더 유명하다.
일단 원본은 아래와 같다.
이것은 위 짤을 우리나라화 시킨 밈이다.
그리고 이것은 위 밈을 햄스터화시킨 버전이다.
과연 내 논문은 햄스터일까 고양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