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일부러 상처를 주려고 말을 꺼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난 믿고 싶다. 차량 접촉사고가 대부분 부주의에 의해서 일어나듯이, 말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는 건 대부분 부주의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난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상처가 될 말을 들어도 의외로 툭툭 잘 터는 편이다.
아주 오래 전에 엄마가 교회에 다녀오시더니만 갑자기 방으로 불쑥 들어오셔서 "너 XX이 좋아하니?" 라며 버럭 소릴 지르셨다.
"아니, 좋게좋게 예배드리고 와서 왜 그렇게 화가 나셨데."
"대답을 하라고, XX이 좋아하냐고."
미리 말하거니와 그 아이가 교회에서 가장 예쁜 아이인 건 팩트였다. 그러나, 나는 예쁨에도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시광선이 무지개빛으로 갈라지듯 난 예쁨도 다 다른 색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중에서 난 그렇게 잘생긴 쪽으로 예쁜 애들은 썩 좋아하질 않는다. 그 친구가 예쁜 건 인정하지만 단언컨대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말하고 나니 무지 재수없게 까다로운 느낌이다).
지금이야 아이유 씨를 보고 누구나 예쁘다 생각하고, 당당하게 예쁨의 한 계보를 담당하고 있지만, 처음 그녀가 '미아'를 부르고 'Boo'와 '마시멜로우'를 외쳐댔을 때 내가 친구들에게 '예쁘지 않냐'고 했다가 '이 변태같은 새끼'라고 욕을 사발로 처먹은 걸 생각하면 지금도 억울하기 짝이 없다(날 욕하던 그 친구의 플레이리스트에 아이유가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을 때 제대로 갚아주긴 했지만).
"너 걔한테 고백한 적 있어?"
"아닌데. 내가? 그럴리가."
"OO권사가 니가 XX이 좋아하는데 걔가 너 자기 스타일 아니라고 했다고... (여기부터 난 빵 터져서 웃기 시작했다) 아니, 왜 웃어! 엄마는 기분나빠 죽겠는데."
"신경쓰지 마요. 어차피 그 양반은 말을 할 때 늘 뇌를 안 거치고 위에서 바로 뱉는 스타일인 거 모르나 뭐."
엄마는 그 이후로도 한동안 분을 못 삭이셨지만 난 그게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도 막상 악의는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냥 생각 자체가 없는 거다. 그러니 나도 그런 문제에 아깝게 내 생각이란 자원을 낭비 할 필요가 없지 싶다.
그런데 반대로 나도 말로 사고를 일으킨다. 특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 있다. 교통사고로 치면 이건 단순 접촉이 아니라 음주뺑소니 수준 아닌가 싶다.
내겐 동갑내기 사촌누나가 있는데 (누나가 3월생, 내가 11월생이라 평소엔 반존대로 대한다) 매형이 두 살 연하다. (내 동생이 두 살이 어리다보니 처음 봤을 땐 진짜 뭔가 애매하드라) 교회에서 만났고, 매형은 목사님이셔서 확실히 인격적으로 나보다는 훨씬 낫고 성숙한 양반들이다.
그때가 언제였더라, 꽤 오래전 명절 일이다. 아마 둘이 결혼하고 그래도 2~3년은 지났을 때였을 텐데, 둘을 오랜만에 본 나는 지나가듯 '아직 좋은 소식 없어요?' 라고 했다. 누나는 웃으며 '그러게' 라고 말을 흐렸고, 매형도 웃으며 계속 노력해봐야지 않겠느냐고 했다. 난 요즘은 나이 많이 먹고도 아이 잘만 낳는다며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다, 즐길 수 있을 때 신혼을 충분히 즐기는 게 백만 번 낫다, 날 봐라 아직 못 간 사람도 있다, 그러며 아무렇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친척들이 모두 돌아가고 방에서 쉬고 있는데 (아마 게임을 하고 있었을 거다) 엄마가 들어왔다.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
"OO이 아기 유산했데."
지금 생각해도 머릿속이 멍하다. 만화 같은 데서 보면 사방이 캄캄하게 변하고 '나 좀 내버려둬' 하면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씬이 있지 않나. 그때 내 기분(이고 지금도 그땔 생각하면 벽에 머릴 찧고 싶어진다)이 그랬다. 정식으로 사과를 해야하나 했는데, 엄마는 아니라고, 몰라서 그랬겠지 할 거니까 괜히 아픈데 덧나게 건드리지 말고 못들은 걸로 하라 하셨다.
그런 일이 정말 한 번 뿐이었을까? 알고보면 나도 범퍼카처럼 좌충우돌하며 살아온 건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갑자기 이불킥을 하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말 함부로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나도 말로 상처준 일이 너무나 많다. 돌이킬 수가 없다. 더 끔찍한 건 어떤 일들은 내가 상처를 줘 놓고도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으리란 거다. 엄연한 현실이다.
이럴 때면 입도 손가락도 죄다 꿰매놓고 싶어진다.
그래도 나름 주변에서는 말을 아예 못한다는 소린 듣지 않아서, 가끔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는 거예요?"라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주 못 산 건 아니구나 싶어 슬쩍 뿌듯함 같은 게 생기기도 하는데, 요즘들어 문제는 질문의 난이도가 점점 올라간다는 데 있다.
갑자기 시한부 선고나 불치병 진단을 받았다든지, 사고로 친구나 부모를 갑자기 잃었다든지, 때론 어린 자식을 앞세운다든지, 갑작스런 감염으로 치료만 받으면 될 줄 알았던 남편이 끝내 뇌사로 기울어 호흡기를 떼는 결정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이야기가 문제로 주어진다. 이런 문제들에는 어떤 말로 답을 해야 하는 걸까? 진짜 답이 나오질 않는다. 할 수 있는 말은 '할 말이 없다'는 게 전부다. 그럴 때면 난 그냥 남은 사람에게 가서 같이 한숨 쉬며 곁에 있어주는 것 밖엔 없을 거라고 답한다.
아주 오래 전 존경하는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삶은 걸음이 빠르고 이해는 걸음이 느려서 언제나 삶이 먼저 가고 이해는 뒤늦게 따라 옵니다. 이해한 만큼 사는 인간은 없습니다. 살고 나니,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해가 가는 겁니다. 그러니 되도록 오래 사십시오. 엎드린 채로 그 자리에서 묵묵히 버텨내십시오. 이해가 찾아올 시간을 벌어주십시오."
누군가에게 할 말이 없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또 나 자신에게 할 말이 없는 순간이 있다. 나라도 나를 달래야 하는데 마음이 유아기로 퇴행을 해버린 건지 내 마음 속에 쓸만한 단어 하나 남아있지 않고 온통 '아', '어' 같은 단음절의 비명들 뿐이다. 돌이켜보면 그 때마다 마치 준비된 것처럼 내 할 말 없는 순간에 다가와 자신의 시간을 내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이십대 후반이었다. 그땐 하루하루가 벼랑 끝이어서 한발만 잘못 내딛으면 낭떠러지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애써 날 붙들고 있었지만, 아무 의미도 보람도 없는데 왜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만 놓으면 모두가 편해지는 거 아닐까 싶은 생각도 많았다. 커튼 너머 햇살은 하염없이 좋은데, 그 빛이 내 마음까지 들어오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날도 울컥울컥 차오르는 서러움에 숨이 꼴깍꼴깍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그때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목사님께 갑자기 전화가 왔다. 강원도에 있으셔야 할 분이 무슨 일이신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세요, 목사님."
"친한 후배랑 약속이 있어서 근처에 왔는데 헤비 선생님(목사님이 전도사 시절에 내가 교회 교사였어서 호칭이 선생님으로 굳어졌다)이 갑자기 생각나서 연락했어요. 선생님한테 연락 해보고 안 바쁘다 그러면 약속 깨고 선생님이랑 놀고, 바쁘다 그러면 약속 가려고 했죠."
그 순간 그 마음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강원도에서 놀러온 목사님은 다시 강원도 낙산 바다까지 날 데려다 놓고서 가슴에 짠 바람 한 가득 넣어준 다음 다시 집에 데려다 줬다. 그렇게 하루하루 어디선가 보내진 마음으로 다가왔던 사람들의 시간을 빌려 내가 지금 여기에 와 있음을 알고, 또 앞으로도 그런 시간이 필요한 순간들이 많이 있을 것임을 안다.
친구와 만나서 우연찮게 지난번 유명 배우분의 안타까운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둘 다 비슷한 감정이었다. 오래 전 노무현의 죽음 이후로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허망한 감정을 느끼긴 처음 같다고...
그 일이 있던 당일날 난 한참동안 폰을 붙들고서 친구들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내야 하나 싶은 생각에 시달렸다.
실질적으로나 객관적으로도 네 잘못이라서
네 편을 드는 게 무조건 내가 바보가 되는 일이라고 해도
딱 한 번은 내가 바보가 되고 말테니
다른 말 필요없이 네 편이 되어달라고만 말해줘
떠난 이의 곁에도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세상이 그의 눈을 가려버린 까닭에 보이지 않았던 거였겠지 한다. 이 모든 게 떠난 이의 탓도 아니고, 남겨진 이들의 탓도 아니다. 난 그리 믿는다.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싶다. 내 주변 사람들이 내게 그런 순간으로 찾아와 주었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마치 미리 준비된 것 같은 위로가 되는 순간이 있기를. 위로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가야 하는 그 날이면 상대에게 필요한 말과 태도가 마침 준비되어져 있기를.
그런 순간 딱 열 번만 채우면 옛날 중국집 쿠폰 북 열 개 채우면 군만두 서비스 주듯이, 천국에 가게 되는 게 아닐까? (군만두와 천국을 엮으니 갑자기 올드보이 생각나면서 좀 섬뜩하기도 한데) 천국은 어려운 곳이 아니지 싶다. 만나면 언제나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천국 아닐까? 그럼 아무래도 천국은 서비스로 가는 곳이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