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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Dec 15. 2024

그래도 우린 좋지 아니한가

혜리 님에게 보내는 첫 번째 교환일기

이런 거 너무 좋아요. 혜리 님은 넘 갑작스럽다고 하셨지만, 이런 갑작스러움은 도무지 싫어지지가 않는단 말이죠.


시간이 갈수록 그런 느낌을 받아요. 사람이 점점 굳어진다는 걸요. 이게 꼭 나쁜 건 아니에요. 어떤 의미에서는 참 편해요. 고민이 없어져요. 어느 모임으로 카페를 들어가든 아메리카노만 시키고, 점심 메뉴가 고민되면 제육덮밥이나 돈까스, 순대국밥 중 하나를 찾아 들어가고, 옷을 고르고 담은 걸 보면 온통 까만 색이고.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저의 아메리카노를 초콜릿 프라푸치노로, 돈까스를 포케샐러드로, 까만 티셔츠를 분홍색 셔츠로, 마음대로 뒤바꿔버리는 거죠.


처음엔 낯설고, 이상하고, 도무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점점 이것도 나쁘지 않다 싶어지고 그러다 결국엔 내가 나같지 않아도 괜찮은 거란 사실을 알게되죠. 처음엔 안정적인 내 스타일을 다 헝클어뜨린 거 아닌가 싶다가 나중엔 그 사람이 내 무채색 세상에 무지개빛을 입혔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요.


여기 적히는 글들은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혜리 님에게 쓰는 글이라 가장 솔직한 글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어떤 의미에서는 저 자신에게도 '나 맞아?' 할 정도로 낯선 글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조금 두근두근하고 설레는 맘으로 자판을 두드려봐요.




한동안 제 외출의 주된 핑곗거리였던 야구 시즌이 끝나고 반칩거 생활 중이었기에 방앗간이라고 할만한 곳이 어디일까 생각해봤거든요. 인터넷세상도 돌아다니는 걸로 끼워주신다면 아무래도 여행 관련된 유튜브나 사이트 아닐까 싶어요.


이상해요. 여행 유튜버 분들의 영상은 사실 제가 좋아하는 여행과는 거리가 멀어요. 저는 여행지를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로 기억하니까요. 경치, 분위기, 커피 셋이 잘 갖춰진 카페에 다녀오면 좋은 여행을 했다는 생각을 해요. 유명한 곳도 좋고, 맛있는 밥집도 좋지만 전 무조건 풍경이 좋은 카페에서 하염없이 밖을 바라보며 가을 날의 나무늘보처럼 앉아있는 게 최고에요. 그런데도 여행 유튜버 분들의 그 피곤해보이는 여행을 지나칠 수가 없어요.


저랑 다른 패턴의 여행이어서 좋은 건지, 우리네 일상과 닮은 패턴의 여행이어서 마음이 쓰이는 건지 조금 헷갈리네요.




인형뽑기를 지금껏 채 열 번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소질이 아예 없거든요. 집게에 제대로 집어 올려본 적도 없는 것 같아요. 이미 스스로가 패배하고 들어가는 거죠. 그런 마음가짐으로는 될 일도 안되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혜리 님이 인형뽑기와 낚시를 연결해서 말씀하시는 걸 들으며 생각해보니 꽤 둘이 비슷한 거 같아요. 하필 제 친한 친구 취미가 낚시인데 그 녀석이 뭘 제대로 낚는 모습을 목격한 바가 없거든요. 심지어 그 친구는 회도 잘 안 먹어요. 어차피 먹지도 않고 잡았다 놓아줄 걸 왜 낚나 하는데, 고요한데서 찌를 던지고 다시 끌어올리고를 반복하는 행위 자체가 마음이 좋아진다나요?


문득 혜리 님이 구명조끼를 입고 방파제 위에서 바다 너머로 낚시 찌를 날리는 모습을 상상해봤는데, 잘 어울리시는 것 같긴 합니다만, 하진 마세요. 낚시에 빠지면 저랑 교환일기 쓸 시간이 영영 사라질지도 모르니까요.




조만간 현금 만원을 들고 인형뽑기라는 세계에 다시 도전해봐야겠어요. 무조건 잃을 거라는 마음 말고 무념무상의 마음으로 덤벼보렵니다. 대신 나중에 생각이 나시거든 제 몫의 인형 하나만 남겨주세요. 저도 귀여운 거 참 좋아하거든요. (앗, 벌써 다 잃어버릴 거란 마음이 다시...)


앞으로 이 공간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듣게 될지, 또 남기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우리 둘 다 극단적인 충동형이니까 일단 되는대로, 내키는대로 쌓아올려 보자고요. 그러다 어느날 테트리스의 긴 일자막대처럼 우리에게 마침 필요한 이야기가 찾아오면 그것만 애써 기억하기로 해요.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

지난 달 생각없이 떠났던 여행에서 만났던 기대치 않았던 풍경이에요. 우리의 계획없는 이 주절거림도 우리를 어떤 기대치 않았던 곳으로 데려다 놓으려나요. 계획도 없고 큰 그림도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믿어요. 침묵과 침잠보다는 우리의 주절거림이 더 아름다울 거란 사실 말이죠.


혜리님의 주절거림의 세계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해요. 나무늘보지만 나름의 최선을 다해 이 재미난 세계를 열심히 여행다니겠습니다. 충성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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