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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Dec 16. 2024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혜리 님에게 보내는 두 번째 교환일기

책을 읽고 있어요. 사실 읽고 있다고 말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막 폈어요. 이제 85페이지를 지나네요. 폴 린치라는 사람이 쓴 '예언자의 노래'라는 책이에요. 요즘 북스타그램에 자꾸 보였던데다가, 예전에 한강 작가님이 수상한 적 있었던 부커상 수상작이라 하기에 서점 어플 장바구니에 담았더랬죠. 집에 온 건 며칠 됐는데 (보통 묵혀뒀다가 읽으니까요) 배송일을 확인하려고 어플 열어보고 눈물 날 뻔 했어요. 이거야 원. 배송일이 12월 3일이었네요. 네, 12월 3일이요.


워낙 초반이니 지금까지 읽은 내용을 정리해도 그다지 문제는 없을 거 같네요. 무슨 문제가 있는지 실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일랜드 정부는 '비상대권법'을 발동시킨 후 '국가의 적'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을 영장도 없이 마구 잡아들이기 시작했어요. 노조활동과 시위를 했다는 이유로 네 아이의 아버지이자 주인공의 남편인 래리도 잡혀들어갔어요. 주인공 아일리시는 아직까지는 이 상황에서 제대로 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어요. 당장 네 명의 아이들을 건사하는 일만으로도 힘겨운 게 현실이죠.


저는 책을 보통 아는 작가 위주로 집어들고, 모르는 작가인 경우에는 제목과 표지 디자인을 보고 뭔가 '땡기면' 사들이기에 내용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어요.


이런 순간이면 숨이 턱 막히죠. 안그래도 우리의 현실 속에 딱 이 소설의 내용과 똑같은 폭풍우가 불어지나갔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그 날 그 밤 하늘에서 눈을 뿌려주지 않았더라면 헬기는 예정대로 군인들을 텅 빈 국회 마당에 풀어놓았을 테고 우리 모두는 이 소설과 똑같거나 더 깊은 어둠에 빠져버렸을 텐데, 저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런 소설을 하필 12월 3일 낮에 받아들었으니 말이죠.




14일은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송년회를 하기로 한 날이었는데 1차 탄핵투표가 투표함도 못 열어본 채 끝난 순간 저는 '혹시 송년회 장소를 여의도로 옮길 생각이 없느냐'고 다섯 명이 모여있는 단체카톡방에 운을 뗐죠. 결국 집회도 하고 송년회도 했어요. 술을 마시지 않는 친구가 나머지를 다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도 당연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눴죠.


"어제(13일)는 이승환이 왔더라."

"선배(저희 고등학교 선배님이시라)는 날씨에도 나시입고 뛰시더라."

"마지막 나오는데 신해철 그대에게 나오는데 나 솔직히 조금 울었다."

"그 양반 살아있었으면 아주 난리였을 거야."

"초반 체포명단에 백퍼센트 들어가 있었을 걸?"

"그리 고생하셨는데 그만 고생하시고 푹 쉬셔야지."


한 명이 신해철 노래를 쭉 훑어 블루투스로 차 안에 흘려보냈고, 우린 고래고래 떼창을 했고, 그 밤 이후로 사흘째 저는 신해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어요.




진짜 두서없는 이야기지만 이런 순서인 거예요.


하나. 입에 신해철 노래가 붙어 있었어요.

둘. 책을 펼쳐들었는데 우리가 겪었을 지도 모르는 평행우주를 그린 소설이란 사실을 깨달았고요.

셋. 하나와 둘이 부딪히자 다시 저는 신해철 노래를 소리내서 부르기 시작했어요.

넷. 그 노래의 제목은 '슬픈표정 하지 말아요' 였고요.

다섯. 그 노래엔 이런 가사가 있어요. "얼마나 아파해야 우리 작은 소원 이뤄질까." 이 문장이 계속 제 마음을 덜컹거리게 만들고 있어요.


결론. 책을 덮고 당장 이 문장을 혜리 님에게 들려주고 싶어졌죠.


얼마나 아파해야 우리 작은 소원 이뤄질까.


이 두서없는 흐름을 속으로 더듬어보다가 "이걸 글로 쓰겠다니 너도 제정신이 아닌 거 아냐?"라며 일말의 판단력이 저를 말렸는데, 책이 배송완료된 날짜가 12월 3일이란 사실을 확인한 순간 판단력이 그날 밤의 계엄군마냥 고갤 푹 숙이고 철수를 해버렸죠.




어른이 되어갈수록 우리는 '우연은 없다' 라거나 반대로 '모든 것은 다 우연일 뿐이다'라는 말을 듣고 살아요. 두 문장은 아예 반대인 것 같지만 사실 하나의 지점을 가리키지 않나 싶어요. 바로, '삶 속에 필연적인 의미는 없다'란 지점이요.


모르겠어요. 더 고민을 해보긴 하겠지만 아마도 저는 의미가 없다는 말을 영영 믿지 않을 것 같아요. 그건 사실의 영역이지 믿음의 영역이 아니지 않느냐고 누군가가 말해도 저는 여전히 믿지 않을 것 같아요. 그걸 믿어버리면 밤하늘에 있는 별이 다 빛을 잃고 꺼져버리는 느낌이랄까요?


다른 나라에 사는 작가는 오랜 시간을 들여 소설을 쓰고, 불의의 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가수는 아름다운 노랫말을 슬픈 선율에 담아 이 세상에 남겨뒀어요. 그 둘이 말도 안되는 현실의 상황과 겹치고 부딪히며 튀어나온 하나의 문장을 저는 여기 골방에 앉아 멀리 있는 혜리 님에게 보내는 거죠.


이 문장이 혜리 님에게 가서 닿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문장을 보내는 저의 마음은 이런 거예요.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을 아파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혜리님과 저의 작은 소원들은 꼭 이루어지고 말 거예요. 그 모든 시간, 한숨 쉬며 먼 길을 돌아 걸어야했고 때론 주저앉아 눈물을 흘려야했던 모든 시간들은 결코 사라지지도 흩어지지도 않고 언젠가 돌아와 한숨과 눈물의 진짜 의미를 알려줄 거예요.


이 마음이 잠깐이라도 위로나 쉼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러면 좋을텐데요. 주머니 속에서 반나절 쯤은 따뜻한 핫팩이나 잘 데워져있는 캔커피처럼 말이죠.




https://youtu.be/g2HmkLLa5Fs?si=IhsP999nO8pBnLxV

(아휴, 우리 마왕님도 젊은 시절엔 참 참하셨네요. 일단 웃음부터 터지네요.)




우리가 만나는 모든 빛들은 생각보다 먼 길을 달려온 친구들이라 당연히 '나만을 위해' 달려왔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우겨대면 남들이 그걸 맞다고 해줄 리는 없겠지만은, 그 빛에게 '나를 위해 달려와 준 거야?' 라고 물으면 빛이 입술을 비죽 내밀며 '맞아. 그걸 이제야 알았어?' 라고 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봐요.


아, 많이 주절거렸으니 저는 이만 다시 책을 읽으러 가볼게요. 부디 이 밤 꿈 속에서 혜리 님을 위해 달려온 많은 별빛들과 둘러앉아 재미난 아파트게임(?)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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