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피어나는 이야기들

[양미르의 영화영수증 #115] <바얌섬>

by 양미르 에디터
4776_4862_4737.png 사진 = 영화 '바얌섬' ⓒ 필름다빈

김유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 <바얌섬>을 보는 내내, 영화가 서두르지 않는다는 사실에 계속 주목하게 되었다. 요즘 영화들이 관객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 얼마나 분주하게 움직이는지를 생각하면, 이 영화의 호흡은 유난히 느리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 느림 속에서 영화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빠짐없이 꺼내놓는다. 마치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가는 구술자처럼.


임진왜란 시기, 거북배를 타고 전장으로 향하던 세 명의 수군이 태풍을 만나 무인도에 표류한다. 나이 지긋한 '몽휘'(이상훈)는 매사에 의욕이 없고 거울만 들여다본다. 젊고 힘센 '창룡'(김기태)은 뗏목을 만들며 섬에서 탈출하려 애쓴다. 막내 '꺽쇠'(이청빈)는 철부지처럼 천진하게 행동한다. 이들의 하루는 대단히 무료하다. 불을 피우고, 앉아 있고, 서로 다투고,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생존을 위한 긴박한 분투는 보이지 않는다. 피부도 멀쩡하고 옷도 깔끔하니, 어딘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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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꺽쇠'가 숲속에서 뼈만 남은 여인의 시신을 발견하면서 섬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손톱을 먹은 쥐가 사람으로 변하고, 밤마다 신비로운 여인이 나타난다. 세 사람 모두 같은 생일을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들이 머무는 공간이 과연 이승인지 의문이 든다. 영화는 이 지점에서 본격적으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흐린다.

<바얌섬>의 가장 큰 특징은 템포다. 이 영화는 조급하지 않다. 표류 영화라면 으레 기대하게 되는 긴장감 넘치는 생존기는 여기 없다. 대신 영화는 세 남자가 섬에서 보내는 시간을 거의 실시간으로 따라간다. 그들이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장면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순간도 영화는 성급하게 건너뛰지 않는다. 처음엔 이 느린 호흡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관객은 '뭔가 일어나길' 기다리게 된다. 하지만 그 기다림 자체가 영화의 의도인 것 같다. 세 남자가 느끼는 무료함과 막막함을, 관객도 함께 체험하는 것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섬에서 이들이 느끼는 권태와 그리움이 천천히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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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민 감독은 광고와 뮤직비디오를 10여 년간 작업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짧은 시간 안에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하는 영상 작업에 익숙했을 그가, 장편 데뷔작에서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시간을 압축하는 대신 늘이고, 명확한 메시지 대신 모호함을 택했다. 이는 상업 영화의 문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이야기 방식을 찾으려는 시도로 읽힌다. 느리다고 해서 내용이 빈약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바얌섬>은 생과 사, 욕망과 번뇌, 기억과 망각에 관한 이야기를 차근차근 풀어놓는다. 세 남자의 나이대가 소년, 청년, 노년으로 설정된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같은 생일을 가진 동갑이지만,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의 분신처럼 보인다. 영화는 섬을 저승으로 가기 전 잠시 머무는 연옥처럼 그린다. 뱀이 허물을 벗듯, 이곳에서 인간은 살아생전 집착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그래서 섬에 나타나는 여인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원한을 풀어주는 존재가 된다. 여인은 이들이 살아생전 이루지 못한 소망을, 억눌렀던 욕망을 드러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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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더욱 흥미로운 건 제작 과정이다. 김유민 감독과 배우들, 스태프는 실제로 3주간 무인도에 머물며 촬영했다고 한다. 독립영화 환경에서 이런 선택은 대단한 모험이다. 편의시설 하나 없는 섬에서 생활하며 촬영한다는 것은,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고립감을 제작진 스스로 체험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이상훈, 김기태, 이청빈 세 배우 역시 이 험난한 여정에 동참했다. 그들이 스크린에서 보여주는 지친 표정과 무기력함은 어쩌면 연기가 아닐 수도 있다. 실제로 섬에서의 생활이 녹아든 결과물일 것이다. 이런 진정성이 영화에 묘한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

※ 영화 리뷰
- 제목 : <바얌섬> (Isle of Snakes, 2025)
- 개봉일 : 2025. 10. 29.
- 제작국 : 한국
- 러닝타임 : 115분
- 장르 : 미스터리, 판타지
- 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감독 : 김유민
- 출연 : 이상훈, 김기태, 이청빈, 전희연
- 화면비율 : 1.33:1
- 엔드크레딧 쿠키영상 :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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